지예

첫 만남 (상)

by 그라쿤

지예와 처음 단둘이 만난 건 추은 11월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한파에 거리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자락을 붙들며 걸음걸이를 서두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늘은 너무나도 화창해서, 때 묻지 않은 상쾌함이 쨍한 햇빛과 함께 내려쬐었다.


난 홍대입구역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의 제안으로 성사된 약속이지만, 무엇을 어디서 먹을지, 만나서 뭘 할 건지 생각해두지 않았기에 막간의 시간을 활용해 주변 음식점과 지형을 대충이나마 훑으려는 의도였다. 하나, 그마저도 귀찮아서 인근 벤치에서 정오 햇빛을 쬐며 지예가 도착할 때까지 선택을 미뤘다. P라서, 원래 계획 세우는 성격이 아니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도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녔었다. 그게 고작 1년 전이니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계획, 그러니까 나의 P 재질은 사실 다가올 미래를 나의 의지로 빚어내고 그 결과물을 맞닥뜨릴 용기가 부족해 앞에 놓인 미래를 순전한 운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홍대역 출구 쪽 경의선 숲길을 서성거리면서 사람구경을 했다. 남들을 관찰하면 묘하게 태연해지기 마련이다.


지예는 친구들과의 부산 여행에서 전날 갓 서울로 돌아온 터였다. 따뜻한 지하철 속에서, 따뜻한 땅속을 통과하고 있었을 그녀는 지상의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몰랐다.


누군가를 지하철 역 출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면, 대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시선 우위를 점한다. 지하철 역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길 시작할 때, 에스컬레이터에 시선을 고정하면 얼마 안 가 기다리는 얼굴이 수평을 맞춰가는 에스컬레이터 계단 위로 떠오른다.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있던 탓에, 단번에 그녀를 알아차린 나와 다르게 인파와 함께 올라온 그녀는 나를 쉽사리 찾지 못한다.


한숨 크게 들이켜고, 찬 공기가 폐에 침투하여 달궈진 나의 혈액을 식히는 것을 느낀 후에야 일방적인 관찰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색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시아 속으로 들어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이질감이 들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놀랄만한 추위로 올라온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해독하기 어려운 미소를 보낸다.


지예는 한파에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은, 얇은 하얀 플리스를 입고 나왔다. 식당을 알아보지 않은 탓에, 우리는 무턱대고 경의선 숲길을 누비며 들어갈만한 식당을 찾았다. 수많은 음식점들과 가지각각의 매력적인 간판들이 되려 선택을 어렵기 했기에, 누구 하나 메뉴를 선뜻 제안하지 못하고 길 잃은 걸음이 계속됐다. 지예는 들어갈만한 곳을 찾는 와중에 코가 찡해지는 찬공기를 들이켜가며 부산 여행에 대해 얘기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의 서울날씨는 따스했으며, 부산에 있을 동안 서울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럽게 얼어붙을지 몰랐다고 그녀의 얇은 것 옷을 설명했다. 그녀의 곱고 얇은 폴리에스터 모직이 힘겹게 붙들고 있던 잔여 체온이 무시무시한 시베리아 기단에 다 삼켜지기 전에 어디든 서둘러 들어가야만 했다.


결국 퓨전 덮밥 식당에 들어가 서둘러 몸을 녹였다. 차슈덮밥을 주문하며 그녀는 들뜬 숨으로 말한다.

“나 고기 아주 많이 좋아해.”

무슨 말로 답할 줄 잘 모르겠어서, 나도 그렇다고 답변했는 것 같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이러한 얘기를 했다. 당돌하고 솔직했다.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기호와 성향을 밝히는데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번화가의 트렌디한 음식점들의 공통점이라 할만한 아쉬운 밥양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그릇을 해치웠다. 대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숟가락질한다고 했건만, 감태색깔 도자기 그릇은 얼마 안 가 금방 윤택한 바닥을 보였다. 숟가락이 그릇바닥 긁는 소리를 놓칠세라 공감대 형성에 나선 지예였다.


“오빠 밥 진짜 빨리 먹는다 ㅋㅋ. 나도 친구들 사이에선 제일 빨리 먹는데. 그래서 항상 친구들이 밥 마저 먹을 동안 기다려. 그런 나보다 빨리 먹네.”

“맞아, 내가 밥을 좀 빨리 먹어. 말라 보여도 많이 먹고 ㅋㅋ”


밥을 빨리 먹는다는 공통점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달랐다. 자리를 옮긴 거리 외각의 카페에서 난 라테를 시켰고,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그녀는 밀크티를 시켰다. 커피를 달고 사는 나와는 다르게, 소량의 카페인만으로 밤을 새운다는 그녀이다. 카페인에 반응하는 정도는 달라도, 앞에 놓인 두 잔의 따스한 차에 안락 해진 건 같은지 처음 만난 쌍 치고는 대화가 술술 오고 갔다.


잔을 다 비우고서도, 어느 하나 먼저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를 알아갔다. 그녀는 로스쿨 진학을 희망하며, 진로를 위해 법동아리에서 총무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사실 홍대입구역에서 약속 잡히고, 밥은 어디서 먹을지 몰라서 약간 혼란스러웠어. 난 계획 없는 건 도무지 못 참는 성격이거든.”

“완전 J인가 보네.”

“맞아. 완전 완전 J야. 그래서 항상 약속을 잡으면 뭘 먹을지, 후에 카페는 어디 갈지 다 알아야 해.”

“어쩌지. 오늘은 아무 식당에서 밥 먹고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잖아 ㅋㅋ.”

“근데 가끔 이렇게 아무 식당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은 거 같아. 낭만 있다고 할까나.”


그리곤 우린 마치 아이들이 사소한 것에 알 수 없는 자부심을 부리듯, 서로 자신의 극단적 P와 J 성향에 대해 실컷 얘기했다. 그녀는 부산 여행을 다시 얘기하며 3박 4일 동안 친구들과 들를 모든 식당과 카페를 사전에 계획했었다고 했다.


“아 참. 이어서 말하자면 나는 계획을 짤 시간마저 계획해. 그러니까 스케줄을 조율하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들거든. 나는 세세한 것까지 고려해서, 완벽하도록 치밀한 한 달 치 일정을 짜기 위해 계획할 시간을 사전에 계획해.”


이걸로 지예의 견고하고 거대한 J가 나의 신임받던 P를 쓰러트렸다. J와 P의 라이벌 서사가 끝나자, 지예는 사뿐히 새로운 주재를 이어나간다.


“아몬드 엄마가 뭔지 알아?”

“아니? 첨 들어보는데 그게 뭐야?”

“그럼 지지 하디드가 누군진 알아?”

“모델말이야? 응 알아.”

“지지 하디드 엄마가 지지한테 배고프면 아몬드 몇 개만 먹으라고 해서, 본인 딸한테 강박적으로 다이어트시키는 엄마를 아몬드 맘이라 그래.”

“아.”

“우리 엄마가 약간 아몬드 엄마야 ㅋㅋ. 할머니랑 아빠는 내게 맛있는 거 자꾸 먹이려는데, 엄마가 나 살찐다고 말려”

“전혀 살찌지 않아 보이는데?”


그녀는 정말이지 말랐었다.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그녀의 얇은 손목과 기다란 뼈대를 감싸, 그녀의 윤곽이 하얗게 소멸되어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렇지. 근데 사실 한 달 전에 3킬로 쪘어서 엄마 말도 이해는 가.”

“에이. 그래도 말랐었을 거 같은데. 나는 오히려 엄마가 너무 말랐다고 잔소리하는데.”


Mbti부터 해서, 어머니의 잔소리 마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