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정거장'이 되기를 꿈꾸며 생을 시작한다.
지친 몸을 뉘일 안식처, 비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 수 있는 지붕, 그리고 언제든 돌아와도
변함없이 나를 맞아줄 누군가의 등.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갈망이자, 가정이 존재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20년 동안 타인의 정거장을 닦느라 자신의 손이 피로 물든 줄도 몰랐던
한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정거장은 안식이 아니라 감옥이었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발라야 했던 붉은 립스틱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의 비장한 갑옷이었다.
남편은 말했다.
"나이가 들면 결국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야."
그 오만한 확신 속에서 정거장은 `보험'이 되었고, 아내는 그 보험의 약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잡혔다.
남편이 밖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방황을 즐기는 동안,
여자는 정거장의 바닥을 증오라는 걸레로 닦아냈다.
반짝이는 바닥 아래로 거대한 균열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부는 서로의 눈을 피하며 외면했다.
우아하고 기만한 가면을 써야만 유지되는 평화, 복수를 위해 또 다른 가면을 써야 했던 여자,
그리고 그 모든 연극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주하게 된 `죽음'이라는 가장 정직한
관객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묻는다.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그 정거장은 안녕한가.
당신이 사랑이라 믿으며 쓰고 있는 그 가면 뒤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는가.
완벽하게 박제된 낙원은 없다.
다만, 서로의 가면을 벗겨내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곁을 지키는 비겁하지 않은
진심이 있을 뿐. 이제 20년 만에 마지막 막이 오르는 이 무대 위에서,
정거장의 주인이 건네는 슬프고도 투명한 진실을 마주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