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박제된 낙원의 아침

쇼윈도 부부

by 바다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아침은 늘 지나치게 정결했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초가을의 햇살은 거실의 이탈리아제 대리석 바닥 위에서

차갑게 부서졌다. 윤정은 그 서늘한 여백 위를 소리 없이 걸었다.

발바닥 닿는 대리석의 감촉은 언제나처럼 낯설고 이물적이었다.

20년을 살았어도 이 집은 그녀에게 안식이 아닌,

매일 아침 검열받아야 하는 전시장과 같았다.


윤정은 베이지색 실크 앞치마를 두르고 습관적으로 은 수저를 집어 들고

식탁 위에 정갈하게 수저를 놓았다. 놋그릇들이 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울려 퍼졌고 최고급 은 세척제로 닦아낸 수저 표면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그 매끄러운 은색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초췌했다.

눈가의 주름은 깊어졌고, 입술은 핏기가 없어 흡사 죽은 이의 것 같았다.


윤정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가장 채도가 높은, 선명한 핏빛의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화장이 아니라 무장이었다.

입술 윤곽을 따라 정교하게 붉은 칠을 덧입힐수록, 거울 속의 윤정은 사라지고

`완벽한 사모님'이라는 박제된 인형이 살아났다.


"여보~오늘 국이 많이 좀 싱거운 것 같아 신경 좀 써. 그리고 나 밥 먹고

넥타이 좀 골라줘."


식탁에 앉은 남편 민석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하게 뱉었다.

윤정은 대답 대신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간장을 내밀었다.

민석의 시선은 아내의 얼굴이 아닌, 신문의 경제 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에게 윤정은 이 화려한 집의 인테리어 중 하나였다.

적당한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하고, 늘 깨끗해야 하며 손님이 왔을 때 과시 하기 좋은 값비싼 가구.


민석이 이토록 가정을 `박제된 낙원'으로 유지하려 애쓰는 데에는 지독한 결핍이 있었다.

보모님의 사업으로 무너진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

엄격하고 장남으로 자라며, 어릴 적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늘 배가 고팠고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본적도 자신의 공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성공이란 60평대의 펜트하우스, 값비싼 가구 외제차, 좋은 음식 그리고

박에서 마음껏 유랑하다가도 언제든 돌아와 군림할 수 있는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이었다.



"당신 알잖아. 내가 밖에서 아무리 딴짓을 해도 결국 내가 나이 들어 돌아올 정거장은 여기뿐이라는 거."


민석이 습관처럼 내뱉는 그 `정거장 이론'은 윤정에게는 가장 잔인한 선언이었다.

그는 정거장을 지키는 역무원의 고독이나, 녹슬어가는 철길의 비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돌아왔을 때 불이 켜져 있고,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기만을 바랬다.


"알아요... 당신한테 여기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윤정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답했다. 속으로는 차가운 냉소를 삼켰다.


`그래, 당신이 돌아올 정거장. 내가 그곳을 얼마나 화려한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지 당신은 꿈에도 모르겠지.'


장성한 딸 지우가 식탁에 앉자 공기는 순식간에 `화목한 가정'의 온도로 치환되었다.


"아빠, 엄마 이번주말에 우리 교외 드라이브 가요 `새로 생긴 카페 예쁜 곳이 있다고 친구들이 추천해 준 곳이 있거든요."


"좋지. 지우가 가자고 하면 가야지, 안 그래 여보?"


윤정 역시 딸의 밥그릇에 정성껏 구운 생선 살을 발라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엄마가 피크닉 도시락을 준비해야겠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아침 식사 풍경이었다. 하지만 식탁 아래, 민석의 무릎 위에는

진동하는 휴대폰이 놓여있었고 식사 내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안방에서 출근을 서두르고 이었다.


"여보, 오늘 넥타이는 이게 나을 끼?"


윤정은 그의 목에 타이의 끝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셔츠 깃 너머로 옅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여자의 파우더 향이 섞여 올라왔다.

지난밤 회식이라며 늦게 들어온 남편의 몸에 배어있던 그 냄새였다.

윤정은 그 향기를 맡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매듭을 고쳐 맸다.


"이게 훨씬 세련돼 보여요. 당신은 이런 짙은 색이 잘 어울리니까."


민석이 윤정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현관을 나섰다.

윤정은 그가 나간 문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집안은 다시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고 온기는 금세 사라지고 대리석의 냉기가 다시 차올랐다.


윤정은 남은 밥을 기계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

20년 전 남편의 배신에 실성해 목을 매려 했던 그 순진했던 여자는 이제 없다.

대신 남편이 가정을 `늙어 돌아올 보험'으로 여기듯 자신 또한 이 집을 `안락한 무덤'으로

이용하는 영악한 여자만 남았다.



윤정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승현이었다.


[보고 싶어요. 그곳의 냉기에서 잠시 나와요]


승현. 그는 윤정에게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이 숨 막히는 전시장에서 잠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산소 호흡기'이자 남편의 오만한 정거장을 비웃기 위해 선택한 `비상구'였다.

승현의 품에 안길 때마다 윤정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쾌락이기보다, 남편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낙원'의 뒷마당에 몰래 구멍을 내고 있다는

파괴적인 희열에 가까웠다.


윤정은 다시 한번 거울을 보았다.

붉은 립스틱이 번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연극 시작할 시간인가?"


그녀는 화려한 외출복을 걸치고, 박제된 낙원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등 뒤로 들리는 도어록의 기계적인 잠금 소리가 마치 감옥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경쾌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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