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정거장 이론의 시작
20년 전의 그날은 유난히도 잔인하게 화창했다.
베란다 너머로 쏟아지는 봄볕은 눈이 시릴 만큼 하얬고, 갓 돌을 지난 지우는 안방에서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윤정은 남편 민석의 셔츠를 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모 없이 홀로 자라온 그녀에게
`가정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신성한 종교였고, 그 종교의 유일한 신은 남편 민석이었다.
지잉--. 식탁 위에서 진동하던 민석의 휴대폰이 그 평화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무심코 화면을 내려다본 윤정의 눈에 낯선 이름과 함께 비수가 되어
날아온 문장들이 박혔다.
[자기야, 어제 비밀 데이트 너무 행복했어. 자꾸만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사랑해.]
순간, 시야가 노랗게 점멸하더니 발밑의 바닥이 툭 꺼져 내렸다.
다리미에서 올라오던 하얀 스팀이 목을 조여 오는 환각에 윤정은 숨을 헐떡였다.
나밖에 모른다던 남자, 세상에서 선량한 미소를 짓던 내 남편이 다른 여자 품에서 `비밀연애'
를 속삭이고 있었다니 그것은 단순한 외도가 아니라 윤정이 평생을 받쳐 쌓아 온
우주의 멸망이었다
퇴근한 민석을 붙잡고 울부짖었을 때, 돌아온 것은 참회 어린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괴할 정도로 당당한 정거장이론이었다. 민석은 샤워를 마친 뒤 수건을 목에 걸고
마치 미개한 자를 가르치는 선지자처럼 오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정아, 나 바람을 피워도 가정은 절대 안 버려. 내 말 잘 들어."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당혹스러워하는 윤정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방황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이가 들면 결국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야. 당신이랑
우리 지우 곁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내가 밖에서 누굴 만나든 내 마음의
종착지는 결국 집이니까.'
비겁한 변명 뒤에 숨은 민석의 눈빛은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가난한 종갓집 장남으로 태어나 남의 눈치만 보며 밥을 먹던 소년은, 이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재력가가 되어 자신만의 `완벽한 왕국'을 건설 중이었다.
그에게 아내와 아이는 그 왕국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고,
외도는 그 기둥 밖에서 잠시 즐기는 일탈에 불과했다.
"당신은 내 정거장이잖아. 기차가 아무리 멀리 가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정거장 하나뿐이야. 안 그래?"
그날, 민석이 뱉은 그 `정거장'이라는 말은 윤정의 가슴에 시퍼런 멍으로 남았다.
그는 아내를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언제든 돌아오면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부동의
건축물로 정의해 버린 것이다.
윤정은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자격조차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 대신 `가면'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래요, 민석 씨 당신 말대로 난 당신의 정거장이 되어줄게요."
윤정은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항복이 안니 선전포고였다.
정거장이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차가 돌아왔을 때 그 선로가 끊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잔인한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의 공기는 그날 이후로 얼어붙었다.
60평의 넓은 공간은 각자의 방으로 철저히 분리되었고, 거실이라는 공용 공간은 오직
`가족'이라는 연극을 할 때만 활성화되는 무대가 되었다.
민석은 아내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믿었다.
아니, 자신의 `정거장이론'이 승리했다고 확신하며 마음껏 밖으로 돌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윤정이 정갈하게 닦아 놓은 거실 대리석 바닥 아래로, 증오라는 이름의 곰팡이가 얼마나 깊고
까맣게 번지고 있는지를..
윤정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붉은 립스틱을 칠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당신이 돌아올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당신이 돌아왔을 때, 이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