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제로서의 타인
승현을 처음 만난 곳은 한남동의 외진 갤러리였다.
민석이 거래처 접대를 위해 `교양 있는 아내'를 대동해야 했던 그날, 윤정은 박제된 인형처럼
서서 무미건조한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승현은 그곳의 도슨트였고, 그는 윤정의 붉은 립스틱 뒤에 가려진 창백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그림, 참 지독하죠? 낙원을 그리고 있는데 정작 화가는 지옥을 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승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문장은 윤정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박혀있던
가시를 건드렸다. 민석이 사람들과 웃으며 와인을 마시는 동안, 윤정은 승현이 내미는
명함을 받아 쥐었다. 그것은 구원의 초대장이 아니라, 금지된 구역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다.
승현과의 만남은 빠르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연인들의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승현의 오피스텔에서 그를 마주할 때마다 윤정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승현의 다정한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남편이 심어놓은 `정거장'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윤정 씨, 왜 그렇게 슬프게 웃어요?"
승현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윤정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낯선 향수 냄새가 좋았다.
민석의 체취도, 집의 대리석 냄새도 나지 않는 무색무취의 공간.
그곳에서 윤정은 비로소 자신이 박제된 인형이 아닌, 피가 흐르는 생명체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마취'였다.
"이 사람은 나랑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든 연극의 관객일 뿐일까.
상관없어. 이 품 안에서만큼은 저 차가운 펜트하우스가 기억나지 않으니까.."
윤정은 승현을 만날 때마다 일부러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가장 짙은 향수를 뿌렸다.
그것은 남편이 닦아놓은 정거장 선로를 이탈하겠다는 무언의 반항이었다.
승현이 내뱉는 달콤한 말들은 그녀의 섞어가는 영혼에 끼얹는 찬물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웠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잠시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승현과 헤어져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정은 차 안에서 거울을 보며 번진 립스틱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정교하게 붉은 선을 그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다시 민석의
완벽한 아내로 돌아가야 했다.
"당신,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쇼핑이라도 했어?"
거실에 앉아 tv를 보던 민석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윤정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네, 아주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거든요."
윤정의 가방 안에는 승현이 준 꽃 한 송이가 시들어 가고 있었다.
민석이 정성스레 가꾼 이 `박제된 낙원'의 화단에는 절대로 피지 않을 낯설고 위험한 꽃이었다.
윤정은 그 시든 꽃잎을 만지며 남편의 뒤통수를 차갑게 응시했다.
복수는 이미 그녀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침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