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와 립스틱 사이의 기만
집안의 온도는 늘 완벽한 24에 맞춰져 있었다.
계절의 변화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이 인공적인 쾌적함은 윤정에게 질실할 것 같은 정적을 선물했다.
펜트하우스의 거실은 거대한 진공관과 같았다.
소리는 벽을 타고 흩어지고, 사람의 온기는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증발했다.
그날 저녁 식탁도 마찬가지였다.
민석은 와인 잔을 돌리며 오늘 체결한 계약에 대해 늘어놓았고, 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한 순간에 감탄사를 던졌다. 20년 차 배우들의 숙련된 연기였다.
"지우야, 너도 아빠 말 좀 들어봐. 나중에 경영 배우려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야."
민석의 시선이 지우에게 향했다. 하지만 지우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난도질할 뿐, 대답이 없었다.
지우에게 이 지은 `집'이 아니라 `무대'였다.
엄마의 립스틱이 짙어질수록, 아빠의 목소리가 다정해질수록 지우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도망쳤다.
"저..... 학원 근처에서 떡볶이 먹고 왔어요. 배불러요."
지우가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민석의 얼굴에 미세한 불쾌감이 스쳤다.
"지우 너, 엄마가 정성껏 차린 식탁에서 그게 무슨 태도야? 떡볶이 같은 싸구려 음식이나 먹고 다니고."
윤정은 순간 손끝이 떨렸다. 민석에게 `싸구려'란 그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모든 것이었다.
가난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세운 이 화려한 성벽 안에서, 떡볶이 냄새는 불결한 침입자였다.
"나 먼저 일어나게요."
지우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식탁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민석은 기분이 상한 듯 와인을 들이켰고, 윤정은 식어버린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낮에 승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을 나눠 먹으며 승현은 말했다.
"윤정 씨는 이런 거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 냄새나네요."
그 `사람냄새'라는 말에 윤정은 울컥했었다. 집에서는 절대로 나지 않는, 땀과 연기와 시끄러운
사람들의 온기. 승현의 손을 잡고 걷던 그 좁은 골목길이야말로 윤정이 갈망하던 진짜 세상이었다.
"여보, 내일은 거래처 부부랑 저녁 약속 있어. 당신 제일 아끼는 그 진주 목걸이 하고 나와 알았지?"
민석은 다시 `정거장 주인'의 목소리로 돌아와 명령했다.
윤정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럼요.. 당신 체면 세워 드려야죠."
민석이 서재로 들어가자, 윤정은 남은 와인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붉은 액체가 하얀 세면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꼭 피 같았다.
`지우야, 미안해. 엄마가 만든 이 가짜 낙원이 너를 숨 막히게 하는구나.'
윤정은 지우의 방문을 열려다 멈췄다.
자신의 손에 묻은 승현의 향수 냄새와 민석이 강요한 가식의 냄새가 뒤섞여 역겨웠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입술이 아플 정도로 립스틱을 닦아냈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여전히 짙은 화장을 한 것 같은 낯선 여자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