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1번째 생일이었던 주말,
나와 남편은 소파에 앉아 맥주에 스시를 먹으며 볼 만한 영화를 찾았다. 왠지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었는데, 그 중 눈에 띈 건 '이웃집 야마다군' 1999년작으로 제법 오래된 일본 4인 가족(+반려견 포치)의 일상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요란한 영화나 드라마가 판을 치는 지금 이 시대에서 평온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저 눈과 귀를 편안하게 하려고 틀어봤는데, 아. 감동했다. 첫 장면부터.
이웃집 야마다군은 과거 엄마 아빠의 결혼식 축사 장면으로 시작된다. 신랑 신부가 함께 봅슬레이를 타고 정신없이 내려오는, 그러면서 중간 중간 폭풍우도 만나고 조난 당하고 길을 잃는 온갖 역경에 부딪히지만 결국 둘이서, 그리고 후에는 넷이서 어떻게든 손 맞잡고 이겨내는 모습. 이 장면에서 나온 축사의 일부분, 빨려들 듯 본 부분을 가져오자면 이렇다.
이제 둘의 새 길이 펼쳐질 텐데,
순풍에 돛을 단 망망대해로 나아가길 빕니다.
인생에는 산도 계곡도 있다고 하는데
때로는 큰 파도에 휩쓸려 나락에 떨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걱정 없습니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무리 형편없는 남녀라도
둘이 함께라면 웬만한 일은 다 헤쳐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웃집 야마다군
맥주병을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나는 둘이서 봅슬레이를 타는 장면의 시작부터 빨려들어가 끝날 때까지 내내 허공에 팔을 멈추고 있었다. '그래. 저게 결혼이야. 저게 가족이고.' 라고 생각하며.
축사 장면이 끝나고는 옆에 있던 남편을 스윽 봤다. 그는 초밥을 우적우적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남편 입가에 묻은 크림치즈가 조금 거슬림과 동시에 문득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곱씹게 되었다. 요즘은 삶이 참 잔잔해서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이 잔잔함 전에는 우리도 큰 폭풍우 속에서 한참을 휩쓸렸음을 새삼 기억해냈다.
결혼 생활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5년 중 3년이 폭풍우였고 이제 겨우 그 폭풍우를 넘어 다 부서진 배의 조각조각들을 다시 모아 뗏목을 만들고 있다. 온갖 일이 다 있었던 이 5년 동안 우리는 가끔은 큰소리도 내고 서로를 흘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안고 토닥이고 손을 잡으며 괜찮다, 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너랑 나는 뭐든 같이 할 수 있다고.
나도 남편도 그리 대단한 몫을 하는 개인들은 아니지만, 둘이서는 어떤 일이든, 짓이든, 모험이든 할 수가 있다. 역경도 그렇다. 내가 힘들면 남편이 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돌보고, 남편이 땅을 팔 때는 내가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는다. 결혼은 그런 것이고, 가족은 그런 것이니까.
아무리 형편없는 남녀라도 둘이라면 웬만한 일은 헤쳐나갈 수가 있다 했다. 둘 다 만으로 스물 다섯, 다소 어릴 때 결혼한지라 우리는 결혼이 어떤 것인지도, 내가 선택해서 만드는 이 가족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인생이 주는 모든 것들, 폭풍 같은 고난이나 슬픔이나 괴로움, 반대로 방방 뛸 만한 기쁨이나 사소한 일상의 행복 같은 정말 모든 것들을 같이 맞이하고 기뻐하고 이겨내는 일이 결혼이다. 가족이고.
요즘 젊은 친구들은 결혼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도 같다. '상대가 돈이 없어서 내가 돈이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집이 없어서 차가 없어서 계약직이어서, 아직 결혼은 무리야.' 뭐, 물론 저마다의 말 못 할 사정이 다들 있겠지만, 너무 그런 것들에만 지레 겁먹고 손을 먼저 내젓기 전에 결혼의 가려진 진짜 의미를 생각해봤으면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결혼도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렴, 평생 따로 살다가 한 집에서 부대끼는 가족이 되는 일인데 당연하다. 내가 선택한 사람을 만나 한 집에 살고 웃고 떠들고,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다투고 싸우겠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상냥하게 대하며 손 꼭 잡고 어려운 일을 하나 둘 지나가다 보면,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이 생긴다.
그러니, 조금 살아보고 안 맞다고 손사레 치거나 하지 말고, 내가 선택한 상대를 최대한 상냥하게 바라보고 예뻐하고 같이 밥먹고 놀고 하다보면 가족이 된다.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가족. 그건 내 원래 엄마 아빠가 있는 원가족과도 한참 다르다. 내가 만든 가족, 폭풍우를 같이 맞고 견뎌낸 가족, 보고만 있어도 애틋한 가족. 결혼은, 처음부터 얼마나 좋은 아파트에 살고 상급지에 살고 호텔 결혼식을 하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다.
결혼에는 호화 유람선을 타고 와인을 마시며 하하호호하는 장면도 분명 있겠지만, 결혼의 대부분은 끝도 없이 계속 또 계속 부서지는 뗏목을 다듬어가며 살아가는 거다. 그 일을 한평생 같이 할 내 가족을 만드는 일이고.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더 힘들지만, 역시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기도 하다.
지레 겁부터 먹지 말자. 따지고 보면 결혼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또 없다. 이웃집 야마다군의 말마따나 아무리 형편없는 남녀라도 둘이 함께라면 웬만한 일은 헤쳐나갈 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