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66
‘이별(離別)’은 ‘어떠한 존재 하고의 헤어짐’을 말한다. 離(떠날 리)는 ‘떠나다’, ‘떼어놓다’, ‘따로 떨어지다’ 등을 뜻한다. 別(다를/나눌 별)은 뼈〔咼=叧〕에 붙어 있는 살을 칼〔刀=刂〕로 발라낸다는 데서 ‘다르다’, ‘나누다’, ‘헤어지다’, ‘떠나다’ 등의 뜻이 파생되어 나온 글자다.
이별은 주로 한쪽이 떠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자발적 이별과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별하는 경우가 있다. 자발적 이별의 경우는 커플들 사이에서 둘 중의 한쪽의 마음이 변하여 많이 이루어지며, 불가피한 이별은 진급, 인사이동, 이직, 전역, 퇴직, 전학, 졸업, 이사, 이민 등의 사정으로 동료, 지인, 친구, 친인척 등의 사이에서 많이 일어난다. 사람이 죽는 것을 ‘사별’ 또는 세상과 이별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별을 다른 이별과 달리 불가역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른 어떤 이별보다 후회와 회한은 많이 남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인 만큼 반드시 겪게 되는 이별이 사별이다.
커플들 사이에 벌어지는 자발적 이별의 경우, 한쪽만의 변심으로 인한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의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헤어지고 싶은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 경우, 이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취하거나 따라다니는 스토킹이 발생하고, 나아가 내가 비참하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이르면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결혼한 부부는 한쪽의 변심으로 인한 이별 분쟁이 생기게 되면 이혼 청구라는 법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연인 사이에는 해당 사항이 없어 좀 더 심각하다.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연인의 살인 사건은 빗나간 사랑의 끝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래도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상대를 죽일 만큼 큰 것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현대에 오면서 이별에 대한 개념도 세분화하여 쓰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이별’이란 말은 커플의 헤어짐으로 한정해서 쓰고, 살아있는 부부의 이별은 ‘이혼’이라는 별개의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간에서 한쪽이 먼저 세상을 일찍 떠나버림으로써 이별하는 상황은 ‘사별’이라고 한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의 평범한 이별은, 이별 후에도 SNS 등을 통해 얼마든지 소통하기 때문에 진정한 이별의 느낌이 덜하다. ‘생이별’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별과의 차이점은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으면 이별, 그럴 가능성조차 아예 없으면 ‘생이별’이라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모든 관계에서 이별은 만남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끝내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와 만남을 시작하는 존재다. 사람은 만남과 이별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만남과 이별을 통해서 살아간다. 세상 모든 인간관계는 인연으로 만나 이별로 끝난다.
이별의 반은 내가 누군가를 버리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누군가가 나를 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버리는 것은 내가 버려지는 것이니 비극이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마음은 효용 가치를 다했으니 그 마음을 접어달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무소의 뿔처럼 달려가던 내 마음을 멈추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나, 오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기다리는 것 역시 고달픈 일이다. 이별을 겪어본 사람만이 이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본 사람만이 마음의 배신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버려졌다는 배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품는 경우, 나와 상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우를 범할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사랑과 같이 이별도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온다. 계획에 따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이별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우연히 그를 떠나게 된다. 십 년을 살든 백 년을 살든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이별, 아무도 이별을 연습하지 않기에 언제나 아프고 애달프다. 영원히 함께할 것 같은 사랑도 이별의 순간이 온다. 원래 혼자였던 내가 다시 혼자가 된다. 아무리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따뜻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살고, 오늘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따뜻한 이별 준비의 시작이다.
이별은 헤어지고, 배척당하고, 버림받고,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모든 마음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상황이다. 두 사람 사이가 나빠졌을 때, 떠나는 것이 옳은지, 남는 것이 옳은지, 판단에는 도덕적 문제에 봉착한다. 그래서 이별은 근본적으로 도덕의 세계에 속하는 미묘한 문제일 수 있다. 본질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은 상대에 대한 예의나 친절과 대립하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떠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해서, 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위안의 속임수가 작동한다. 떠나는 행동이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잔인한 일임이 분명하기에 자기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이별할 때, 그 대상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상실이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남겨 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는 것은 사실, 누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갖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제 마음 하나를 갖지 못하는 외로움이다. 사랑만이 내 삶의 전부이고, 영원히 기다려야 할 대상이라는 사랑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부질없는 환상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활력이 넘치는 사람은 사랑에 실패해도 이내 다시 일어나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면서 방황하며 세월을 보낸다. 삶의 전부일 것 같은 사랑도 한 줌의 의심이 싹트는 순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나마 모든 사랑에는 이별의 씨앗이 숨어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 씨앗이 있기에 또 다른 사랑이 싹트는 것이다.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나간 사랑은 현재의 사랑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잊힌 의미로 남는다.
이별 뒤에는 둘만의 물건, 추억, 편지 그리고 혼자서 해결해야 할 마음의 앙금 등이 남는다. 부부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아이들 문제가 남기도 한다. 사랑하다가 헤어진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내 곁에 없지만, 어디에선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가 내게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뿐이다. 이렇게 이별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며, 둘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뒤에도 삶이 계속되기 때문에 망각의 훈련이 치유의 최고 비법이 된다.
워낙에 이별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다 보니 이제는 이별이라는 게 정말로 이별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헤어진 연인이나 부부가 인연을 완전히 끊지 않은 채 친밀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헤어져 살다 보니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었네’라는 생각에 재결합하기도 하고, 오랜 친구 관계로 남기도 한다. 좋게 헤어진다는 말이 헤어짐을 포장하기 위한 빈말이 아닌 시대다. 씁쓸하지만 헤어짐이 쉬워진 대신 오늘날 이별 뒤의 사랑은 이렇게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아닌 담담함으로 곁에 남게 되었다.
이별은 또 다른 비움이다. 비움이 있어야 채워지듯, 이별은 새 사람이 오기 위한 사전작업쯤으로 가볍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별했을 때 가장 빠른 치료제는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도 있다. 이별은 멀리 떨어져 서로의 별이 되는 것. 이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환희의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린다.
부디 이별에 매몰되어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살지 말고, 또 다른 새 삶을 찾을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