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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석연 Aug 24. 2024

171. ‘그냥’의 의미

삶은 의미다 - 171

그냥은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뜻으로 아무 뜻이나 조건이 없다라는 의미다. 그냥 쓰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쉽게 사용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왜 그리 생각하느냐?’ ‘왜 그랬느냐?’ 등의 대답하기에 곤란하거나 질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 그냥이라는 대답을 한다. 그렇지만 ‘그냥’이라는 대답은 상대방의 질문에 명확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성의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 그저가 있는데 ‘그냥’보다 뉘앙스라 좀 부정적인 표현이다. ‘그냥 그렇다’와 ‘그저 그렇다’는 후자가 더 안 좋은 느낌이다.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말하기 거북할 때 쓰는 거시기도 ‘그냥’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거시기는 전라도의 대표 사투리로 통하지만, 사실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 표준어다. ‘그냥’이나 ‘거시기’는 딱히 적절한 말이나 단어가 도통 생각이 나지 않거나 분명하게 말하기에는 난처하고 어색할 때 쓰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전천후 단어들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용하면 듣는 이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대화가 끊어질 수 있어 남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둘 다 애매모호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쉽게 사용하지만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거시기한 단어들이다. 

‘아주 그냥 죽여줘요~!’라는 노래 가사도 있지만, 구어의 ‘아주 그냥’은 평범하다는 ‘그냥’이 ‘아주’의 의미를 강조하는 추임새 같은 역할을 한다. ‘확 그냥’, ‘막 그냥’ 등에서도 같은 역할이다. ‘그냥 라면’과 같이 명사 앞에서 쓰일 때는 ‘보통, 일반’의 의미다. 인터넷의 대화창에서는 ‘걍’으로 줄여서 쓰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애완동물의 시대에 고양이 이름을 ‘그냥이’, ‘저냥이’라고도 부른다.

그냥은 이유가 아니라 여유라고 볼 수도 있다. 살면서 찌질하게 자잘한 이유 등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겠다는 여유 말이다. 우리가 하는 말 앞에 ‘그냥’이라는 말 하나만 얹어도 삶이 훨씬 더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벼워질 수 있다. ‘그냥’이라는 대답에 발끈하거나 다시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넉넉하지 못하고 재미가 없다. 또한 가볍고 넉넉한 ‘그냥’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그래~!, 그냥 이대로만하고 소망하는 보잘것없는 지혜가 즐겁고 멋진 인생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냥’이란 말을 자주 입에 달고 사는 것만큼 사랑한다. 모든 일을 목숨 바치지 않고 습관처럼 그냥 하고, 그냥 일어나고, 그냥 읽고, 그냥 쓰고, 그냥 공부한다. 왜 사느냐?’ 물어봐도 쉽게 그냥 산다라는 대답을 한다그냥 살아온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아도 지난 삶보다 훨씬 좋은 일상을 누리고 있고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좋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시간이 되면 그냥 하고 그냥 멈추며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에 개의치 않고 일상은 그냥 계속된다. 일일이 저울로 재고 따지고 분석하는 자체가 이미 힘들고 지쳤다는 신호다. 이럴 때 발휘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하는 그냥의 힘이고 지혜다. 지금 모습의 삶이 모두가 ‘그냥’의 덕분이라 말하면 과한 해석일까.

연애할 때 누구나 한 번쯤 해 보고 들어봤을 대화.

“자기, 나 사랑해?” 

“응~!”

“왜 사랑하는데?”

“그냥~!”

“그냥 사랑하다니?”

“정말 그냥 니가 좋아~!”

사랑하는 이유가 ‘그냥’이라니, 이처럼 비논리적인 대답이 가능한 이유가 뭘까? 논리적으로 되려면 네가 이뻐서, 귀여워서, 성격이 좋아서, 돈이 많아서 등의 사랑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목숨 바치는 위대한 사랑을 하는데 이유가 애매모호한 ‘그냥’이라니… 그럼에도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상대도 발끈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마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사랑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 모두 말할 수 없다는아니면 어떤 계산과 비교도 없이 순수한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는대놓고 말하기에는 좀 쑥스럽다는 속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을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사랑의 미사여구를 동원한 어떠한 표현보다 담백하면서도 사랑의 무게감을 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너는 왜 날 사랑해?’라고 물으면 나도 그냥~!’이라 명쾌하게 답하고 웃는다.

이렇게 우리들이 애용하는 ‘그냥’은 숨겨진 뜻을 잘 해석해야 해야 오해가 없다. 친구와 대화할 때, ‘어찌 사나?’ 그냥 산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별 탈 없이 그럭저럭 잘 산다고 해석하면 된다. 그냥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사람~’은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헤어진 연인이 전화가 와서 그냥전화했어라고 하면 망설이다가 다시 보고 싶어 자존심 죽이고 했다는 말이니 ‘그냥’이란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어느 날 부모님이 전화가 와서 그냥 해봤다.’라고 말씀하시면 자식이 엄청 그립고 보고 싶다는 말이다.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그냥 안부 전화했어요.’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부를 때 ‘왜 불렀어?’라고 물으면 그냥 불러봤어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나 연인이 간절하게 내 곁에 있다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다. 말로는 ‘그냥’이지만, 실제로는 ‘친근함을 확인하기 위함’이나 ‘심심함의 해소’ 등 다양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고’라는 표현도 뻘쭘하거나 이유가 있긴 하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이럴 때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예의다. 

누군가 지금 내 생활을 물어보며 어찌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그냥 산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특별한 일과 성취가 없는 싱거운 대답이지만 모든 것이 그냥지금처럼만~!’이 희망이고 바람이다. 앞으로 하루하루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그냥’이라는 답을 종종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냥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상대는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용하기 어색한 단어다. 그러니 살면서 내가 ‘그냥’이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매우 외로운 상태라는 뜻이다. 시시하고 싱거운 단어를 건넬 사람이 없는 세상은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은 때로는 싱거우리만치 편해야 한다. 그래서 그냥은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하고 좋다. 

자연에 사는 동물들의 어미는 DNA 전달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를 갖고 새끼를 낳지만, 새끼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태어나고, 그냥 살아가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 그냥 등장했고, 그냥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그냥 사라지게 될 것이다.     


권력명예에 파묻혀 아등바등하다 보면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만 생긴다원대한 목표 의식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냥은 스트레스가 생길 리 없다그냥 삽시다세상 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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