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관련 전공, 진로, 직업에 대한 이야기
화학 계열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종종 물어봅니다.
“어디까지가 화학회사라고 생각하나요?”
그런데 의외로,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학회사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기준은 없으며, 다만 한국표준산업분류상으로는 ‘화학물질 및 화학제품 제조업’이라는 항목이 가장 가까운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화학회사는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현실에 맞다고 느껴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1) 그 회사 제품의 주요 원료가 화학물질인가?
2) 그 회사의 연구 인력 대부분이 화학 관련 전공자인가?
(화학공학, 공업화학, 고분자, 신소재, 화학, 응용화학 전공 등.)
이 두 가지를 충족한다면, 그 회사는 충분히 ‘화학회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석유에서 시작되는 화학의 세계"
대부분의 화학제품은 석유에서 시작됩니다.
석유를 정제하면 휘발유·경유 같은 연료유와 함께 ‘나프타’라는 물질이 나옵니다. (납사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이 나프타를 분해하면 에틸렌, 프로필렌과 같은 기초유분이 만들어지고, 이를 다시 합성(중합)하면 합성수지. 즉, 플라스틱과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재료가 됩니다.
석유 -> 나프타 -> 기초유분 -> 합성수지(플라스틱)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회사들이 바로 정유사와 석유화학회사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으로 GS칼텍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이 있죠. 엑손모빌, BASF, DOW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만을 ‘화학회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화학산업의 일부일 뿐입니다.
"화학은 석유에서 출발하지만, 진짜 세계는 그 너머에 있다"
석유화학 단계 이후에는 본격적인 화학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앞 단계에서 만들어진 기초유분과 합성수지들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수많은 산업에 쓰입니다.
-페인트, 접착제, 건자재
-섬유, 포장재, 생활용품
-헬스케어, 식품
-자동차, 전자, 항공, 기계부품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소재 등.
위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페인트회사’, ‘섬유회사’, ‘전자재료회사’로 불리지만, 사실 전부 화학회사의 일종입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객이 구매하는 것은 “화학”이 아니라 “용도”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회사 이름과 브랜딩에서는 화학의 색채가 희석되어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화학이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이 정의와 구분이 중요할까"
화학산업이 워낙 넓다 보니, 전공자들조차 ‘화학 관련 회사’의 범위를 제대로 모르고 취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오직 ‘들어본 대기업’만을 화학전공의 바람직한 진출분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들어, 화학공학 전공자들은 반도체, 배터리, 전자, 제약, 소재 등으로 다양하게 진출합니다. 정유·석유화학 기업에 가는 비중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즉, 화학물질을 주로 다루고, 응용하는 일을 한다면 화학관련 전공자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앞선 정의에 따라 그 회사는 화학회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공자에게 필요한 건 ‘정의’다"
저는 20년 가까이 화학 분야 전문 헤드헌터로 일하며, 대학에서 화학계열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에서 늘 강조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몰라서 지원하지 못하는 회사는 없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대부분의 전공 교수님들은 사기업 취업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현실적인 구직 조언까지 기대하는 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대신 교수님들은 전공과 연구 측면에서 훌륭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시는 분들이죠.)
따라서 이런 포괄적 정의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폭넓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화학계열 전공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길잡이가 됩니다.
진로를 정하거나 구직활동을 준비할 때, 자신이 지원할 수 있는 산업의 범위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화학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커리어 개발에도 유용합니다.
화학기술 분야뿐 아니라 인사, 회계 등 경영지원 직무에 있는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직이야 그렇다 쳐도 경영지원은 굳이 동종산업일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비슷한 산업군 출신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업 구조, 매출 형태, 수출입 프로세스, 조직 규모 등 비즈니스 구조가 비슷하면 업무 이해도가 빠르기 때문이죠. 실제로 많은 기업의 경영지원직 JD(모집요강)에서도 "동종산업 경력자 우대" 라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 기업 인사담당자에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 회사가 화학산업의 밸류체인 중 어디에 위치해 있고, 주요 경쟁사는 어디인지, 입사자와 퇴사자의 이동 경로는 어떠한지를 파악한다면 훨씬 깊이 있는 인사업무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인재채용을 할 때에도, 화학분야 전문헤드헌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화학계열 전공을 고민하는 중·고등학생들의 진로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화학으로 갈 수 있는 산업이 어디까지인가’, ‘화학을 업으로 한다는 건 어떤 일인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쨰, 거창하지만 국가적으로 산업정책을 설계하는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한국은 이미 출하액 기준 세계 5위권 화학산업 국가이고, 정부도 ‘K-화학 로드맵 2030’처럼 화학을 전략 기간산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 정밀화학/바이오화학/첨단소재 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R&D 지원, 세제 혜택, 규제 설계가 정확한 타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에이피써치 화학팀 리더
임상언 대표
steve@apsear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