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16
보험 영업 현장의 한 달은 캘린더의 숫자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업적'이라는 신(神)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는 처절한 수련의 과정이다. 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운명의 '마감 회의' 일정이 잡힌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지역단의 공기는 질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인근 지역 각지에서 모여든 지점장들이 회의실로 들어선다. 리크루팅 대박을 터뜨렸거나 신계약 실적이 하늘을 찌르는 지점장들의 구두 소리는 경쾌한 스타카토로 울리지만, 대부분의 미진한 지점장들의 발걸음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그것처럼 무겁고 질척거린다.
회의실 풍경은 흡사 군사 작전 통제실을 방불케 한다. 지역단장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선 책상 위에는 지점별 중간 성적표가 잔인하게 놓여 있다. 며칠 남지 않은 영업일자에 목표와의 차액을 의지로 채우고, 그 의지가 거짓말이 되지 않게 거품을 만들어 채워야 하는 것이 마감일까지의 행동전략이다. 그리고 그 중간 성적표 옆에는 어김없이 노란 오렌지 주스가 담긴 종이컵이 유니폼을 입은 여사원에 의해 한 잔씩 배달되어 있다. 그 주스의 색깔은 묘하게도 시골 농가 창고 구석에 놓인 농약 원액의 빛깔을 닮았다.
"이거... 농약 맞지? 한 잔 주욱 들이켜고 그냥 여기서 확 죽어버리고 싶네."
가장 먼 원격지에서 달려온 주진형 고참 지점장이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농담 반 진담 반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의 얼굴엔 마감의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에게 이번 달은 유독 가혹했다. 몇 달 전 공들여 뽑아놓은 신인 설계사들이 타사의 스카우트 제의에 홀려 대거 이탈했고, 그 여파로 신계약은커녕 유지율과 정착률 지표가 초토화된 상태였다. 실적이야 본인 명의의 약관대출을 받아서라도 어떻게든 메우겠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간 조직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마침 지역단장의 별명은 '망치'였다. 말 그대로 부진한 지점장들의 정신을 망치로 때리듯 부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목표 미달 지점장 기립! 일어낫! 앉아!"
단장의 서슬 퍼런 호통에 30대는 물론 40대 중반이 된 가장인 지점장들도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앉기를 반복했다. 실적이 인격이 되는 곳,
"일어나! 앉아! 일어나! 앉아!"
"주진형은 자동!"
자동이라는 말의 뜻은 단장의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의자 스쿼트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자동'은 몸이 망가지기 전에 모욕감으로 멘탈이 먼저 무너뜨린다. 보험회사 영업 회의실에서는 모욕적인 언사와 군대식 '얼차려'는 성장을 위한 채찍질이라는 명목하에 묵인되곤 했다.
폭풍 같은 회의가 끝나고 이어진 회식 자리. 회의는 회의, 회식은 회식이다. 전쟁터 같던 회의 후에도 회식자리에서는 동료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다. 하지만 그날 주 지점장은 평소와 달랐다. 억눌렸던 울분이 알코올을 타고 터져 나왔는지, 그는 주는 술잔을 마다치 않고 폭주하듯 마셔댔다. 평소라면 차를 두고 택시를 탔을 그였지만,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운전대를 잡고 말았다.
칠흑 같은 밤, 집으로 향하던 그의 차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을 브레이크 한번 없이 그대로 치고 말았다.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둔탁한 충격음. 뒤늦게 앰뷸런스와 마침 지나가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현장에서 측정된 주 지점장의 혈중 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을 훨씬 웃돌았다.
"물 좀 마시고 다시 불어 보세요."
경찰의 배려 아닌 배려에도 결과는 참혹했다. 두 번째 측정치는 첫 번째보다 더 높게 나왔다.
보행자는 현장에서 숨졌다. 횡단보도 일시정지 의무 위반, 음주운전, 사망 사고. 보험전문가였던 그였지만, 운전자보험조차 '음주 사고'의 형사합의금은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고 직후 그는 바로 구속되었고, 회사에서는 출근이 되지 않는 그를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보험혜택은커녕 회사에서도 위로금 한 푼 없이 구치소에 수감된 것이다. 아직 그는 한참 키워야 할 두 아이의 가장이다. 20여 년간 쌓아온 '보험인'으로서의 명예와 삶이 단 하룻밤의 실수로 나락으로 처박힌 순간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동료 지점장들과 함께 그가 수감되어 있는 지역 구치소로 면회를 갔다. 그런데, 가슴앓이로 뼈만 남았을 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면회실 유리 너머로 나타난 주 지점장은 못 알아볼 정도로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피부는 오히려 밖에서보다 훨씬 매끈해 보였다.
"어이, 다들 왔어? 허허, 나 봐라. 여기는 리크루팅 안 해도 되고, 목표 달성 안 해도 되니 세상 걱정이 하나도 없네. 밤마다 업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고 잠을 자니 살이 이렇게 붙더라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네."
그는 역설적이게도 창살 안에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밖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며 달렸지만, 정작 그 삶을 찾은 곳은 역설적이게도 감옥이었다.
구치소를 나오는 길, 우리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영업 현장에서 '진정한 삶'이란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주 지점장은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리크루팅과 마감 목표라는 쇠사슬에서 풀려나 '저녁'을 되찾았다. 회의 때 부른 마감숫자가 불가능해 보이면 큰 사고가 나서 입원해 버렸으면 좋겠다, 농약 원샷하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 어느덧 마감일은 지나가 버리겠지 하는 생각들. 밖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우리들의 일상은 어떠한가? 계절이 바뀌는지, 철 따라 어떤 꽃이 피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숫자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숫자를 리크루팅 하는 우리와, 창살 있는 곳에서 평온을 찾은 그. 누가 진짜 수인(囚人)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험이라는 창(窓)을 통해 본 주 지점장의 인생 풍경은 참으로 쓸쓸하고도 아이러니했다. 그가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이제는 숫자가 아닌 꽃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있기를, 한때 전장에서 가슴을 맞대었던 동료로서 진심으로 빌어본다.
여러분의 응원 한마디가 보험인생 30년의 기억을 기록하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