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정말 죽고 싶었을까?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15

by 보험외길

​"남수 씨가 요즘 이상해."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자영업을 하는 김남수 씨는 늘 먼저 밝게 인사하던, 예의 바르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간 가게 문을 닫더니, 다시 나타났을 땐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히 누구도 선뜻 "무슨 일이냐"라고 묻지 못할 만큼 그의 슬픔은 깊고 무거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의 아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집 안방에서 목을 매달아 세상을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사고가 있던 날 아침, 부부는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평소 활달한 남수 씨와 달리 아내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편이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남몰래 가슴앓이를 해온 아내의 적막함은 남수 씨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을지도 모른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수 씨를 맞이한 것은 평소와 다른 '기괴한 정적'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빈 소주병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고, 집안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여보, 나 왔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에 있는가 싶어 안방 문을 연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를 힘조차 잃고 주저앉았다. 아내는 자신의 키보다 낮은 벽 고리에 줄을 매단 채 목을 걸어, 마치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듯한 기이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타살 흔적은 없었다. 혈중알코올 농도가 높았다는 점 외엔 유서 한 장 남지 않은 전형적인 '자살'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남수 씨는 아내를 가슴에 묻고 장례를 치른 뒤, 가입되어 있던 A보험사에 사망보험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고객님, 자살은 '고의 사고'에 해당하여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습니다."

상심에 빠진 남수 씨가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평소 우울증 약을 드셨나요?"
"아니요... 성격이 좀 어둡긴 했지만 병원 치료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날 술을 많이 드셨다고 했죠?"
"네, 평소엔 맥주 한 잔 정도였는데... 그날은 거실에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더군요."

​나는 그가 갖고 온 경찰서 변사사고 보고서와 해당 계약의 약관을 살펴보았다. 변사보고서에는 사망원인은 '자살', 자살의 원인으로 '목맴'이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상해사망 사고에 해당되고 사망보험금은 5억 원이었다. 이 약관 상해사망사고에서 보상하지 않는 손해의 내용은 금융감독원 표준약관의 내용과 동일했다.

[보상하지 않는 손해]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상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피보험자가 심신 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합니다."

핵심은 '피보험자가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라는 단서 조항이었다. 상해보험에서 ​ 자살 사고는 가장 치열한 전쟁터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모든 연령대에서 자살이 증가하고 있어 암을 제치고 사망원인 1위에 올라 있다. 또 보험금도 고액이다. 보험사가 "스스로 목을 매는 행위 자체가 죽으려는 고의를 증명하는 것"이라며 일단 면책(지급 거절)을 통보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법의 잣대는 조금 다르다. ​
상법 제732조의 2 사망 사고가 계약자나 피보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에도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

즉, 취한 상태나 우울증상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자살은 '고의'가 아닌 '중과실'로 볼 여지가 충분했다. 자살 사고에서는 피보험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 여부가 쟁점인데 당사자인 피보험자가 사망하였으므로 진실은 추정할 뿐이어서 그 판단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망자가 당시 자유로운 의사결정이었냐는 구체적인 사고상황에 대한 판단은 대부분 소송을 통한 사법기관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자유로운 의사결정 여부에 대한 입증은 누가해야 하는가이다.

판례의 경향은 피보험자의 유족은 자살이라는 보험사고 발생사실만 입증하면 되고, 이에 대한 면책사유는 보험회사가 입증해야 된다. 여기서 입증의 정도는 사법기관의 기록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해야 인정된다. 그래서 대개 자살의사를 밝힌 자필 유서 같은 물증 없이는 보험사가 주장하는 입증이 명확하지 않아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하고 있다.

"이 건은 사망보험금이 5억 원이 넘습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을 거치더라도 보험사가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보험사 직원도 떨리는 금액이라 판결로 떠넘겨야지 스스로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기 힘들 겁니다. 소송까지 각오하셔야 합니다."
​남수 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송이라니요... 저는 그런 거 해본 적도 없고..."

​나는 같은 동료 신체손해사정사와 보험 전문 변호사를 연결해 주었다. 보험사 소속이 아닌, 오직 고객의 권익만을 위해 싸우는 전문가들이 팀을 이뤘다. 자살건은 보험금이 고액이라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것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약관상 지연이자와 소송이자가 꽤 높으니 너무 조바심 가지지 알고 긴 호흡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몇 달 뒤, 법원의 판결은 예상대로였다. 보험사는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로 자살하였다는 추상적인 주장뿐이었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법원은 물증 없이는 면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A 보험사는 원고에서 사망보험금 5억 원과 그간의 지연 이자를 전액 지급하라."


남수 씨는 법정을 나서며 텅 빈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수령한 5억 원의 보험금과 이자. 누군가에겐 일확천금처럼 보일지 모를 그 돈이 남수 씨에게는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눈물 젖은 편지'와 같았다. 아내의 빈자리를 금전이 채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돈은 아내를 잃고 벼랑 끝에 서 있던 남수 씨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준 '구조 로프'가 되어주었다.

​세월이 흘러 남수 씨의 가게에는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이웃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며 생업의 현장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끝까지 지지해 주었던 담당 설계사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VIP 고객이 되었다.

​보험은 단순히 '죽음'이나 '사고'에 베팅하는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처절한 어둠 속에 갇혔을 때,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비춰주는 '마지막 가로등'이다. ​우리는 때로 보험사가 내미는 약관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끝까지 지켜낼 때, 보험은 비로소 불행의 담보를 넘어 한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거룩한 약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나와 평생 인연을 맺은 고객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그 소중한 권리, 그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일에 나의 30년 보험 인생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 본다.

여러분의 응원 한마디가 보험인생 30년의 기억을 기록하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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