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의 혈투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14

by 보험외길

​보험회사 지점장으로 살다 보면 난감한 순간이 있다. 바로 보험은 남한테 들고, 보상 상담은 나한테 올 때다. 어느 날, 우리 지점의 베테랑 허미순 설계사가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왔다.

​"지점장님, 제 고객님인데 상담 한 번만... 그분 인상은 참 좋으세요!"

​그렇게 마주하게 된 '권율도' 고객. 성함부터 범상치 않은 이분, 역시나 상담의 목적은 신규 계약이 아니었다. 타사에 가입한 상해보험금이 '지급 거절'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러 원거리에서 달려오신 것이다. 지점장 입장에선 시간도 뺏기고 민원 위험도 있는 '독이 든 성배' 같은 상담이었지만, 허 설계사의 체면을 봐서라도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사건은 어느 평화로운 오후, 교차로에서 시작되었다. 초록 불을 받고 정상 주행 중이던 권율도 씨 앞에 갑자기 자전거 한 대가 빨간불을 무시하고 툭! 튀어나온 것이다.

​"끼익——!"

​간발의 차로 멈춰 섰다. 천만다행이었다. 권율도 씨는 창문을 내리고 한마디 했습니다.

"아니, 아저씨! 신호를 보셔야죠! 인명사고 날 뻔했잖아요!"

​상대방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길래 그렇게 훈훈하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백미러를 보니 아까 그 자전거가 미친 듯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다음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인 권 씨의 차를 가로막더니 냅다 소리를 지른다.

​"야! 내려 봐요! 아까 나한테 뭐라 그랬어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는 미안하다던 태도는 어디 가고 눈을 부라렸다. 권 씨도 참지 않았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길거리에서 심한 고성이 시작된 것이다.

​"당신 때문에 놀라 자빠질 뻔했는데, 어디다 대고 훈계질이야?"

"누가 무단횡단하랬어요?"


​말싸움은 금세 몸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상대방이 권 씨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팽개쳤고, 열이 끝까지 뻗친 권 씨도 일어나 상대의 멱살을 낚아챘다. 그러자 상대방이 주먹질을 했고, 급기야 권 씨는 상대방의 팔을 붙잡아 '콰직!' 하고 깨물어버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결과는 권 씨 전치 4주, 상대방 전치 2주. 경찰서 엔딩과 함께 '쌍방 폭행' 판결이 났다.


권 씨는 집 근처 병원에서 입원과 통원치료를 하고, 치료비를 받기 위해 A 보험사에 상해보험금 청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보험금 지급거절이었다. 폭력행위는 상해보험 면책약관, 즉 보상하지 않는 손해라는 것이다.


​[상해보험 면책약관]

"피보험자의 '폭력행위'로 인한 사고는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보상하지 않습니다."


​보험사 측 논리는 단순했다. "당신도 멱살 잡고 깨물었으니 폭력행위자다. 그러니 보험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맞은 것도 억울한데 보험금도 받을 수 없으니 잠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법상 '폭력행위'라는 것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를 가리키며, 그 유형력의 행사는 신체적 고통을 주는 물리력의 작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권율도 고객이 폭력행위에 가담된 것은 분명한 듯했다


"혹시 경찰서에 접수된 사고사실 확인원 갖고 있으세요?"

"네, 가지고 왔습니다."

사고사실 확인원을 살펴보니, 쌍방 폭력행위로 확인되었다. 다만, 권율도 고객의 말처럼 자전거 탑승자가 먼저 폭력행위를 행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상대방이 권율도 고객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넘어지게 했는데, 직접적인 타격이 없어도 멱살을 잡아 흔드는 행위도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율도 고객은 관할 지방검찰청에서는 '불기소 결정'을 하였으나, '기소를 유예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는 '무혐의'가 아니라 폭행사고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폭력행위를 행사하였고 권율도 고객은 상대방의 폭력행위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는 것이 같은 폭력행위라도 자전거 탑승자의 폭력행위와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용을 확인한 후 권율도 고객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제가 보기에는 보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보상직원 잘 협의가 되지 않으면 그 이후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를 한번 해 보시죠?"

"금융감독원요?"

"네, 보험금에 서로 다툼이 있는 경우 소송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일반 고객들은 소송 자체가 부담되니 금융감독원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무료로 이용가능하고 결과도 빨리 내려주거든요."

"지점장님, 이 경우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권 씨에게 손해사정에 관한 비책을 전수했다.

​"고객님, 약관해석상 보험사가 면책할 수 있는 '폭력행위'는 내가 먼저 때리려고 작정한 '고의'일 때나 해당하는 겁니다. 먼저 공격당해서 방어하다가 벌어진 일까지 보험사에서 면책하는 것은 상법 위반일 수 있어요!"

"아, 폭력이라고 무조건 안주는 건 아니란 거죠?"

​"그렇죠. 고객님이 먼저 폭행을 행사해서 스스로 초래한 위험은 고의사고로 보고 면책이지만, 고객님이 예기치 못한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의 폭행은 '고의'가 아니라 '중대한 과실'로 볼 수 있어요."


나는 추가적으로 덧붙였다.

"상해보험에서는 중과실 사고는 보상이 됩니다. 보험사에서 고객님의 폭행이 고의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아마 금융감독원에서 고객님의 손을 들어줄 거예요."


[대법원 판례]

피보험자가 예측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사고로서 예견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발생하여 통상적인 과정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사고로 인한 손해는 보상한다. 그러나 피보험자 스스로 초래한 위험에 대해서는 보험회사가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즉, 폭력행위에서 면책약관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폭력사고는 면책약관이 적용이 되지만, 상대방의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행위는 고의가 아니라 중과실로 봐야 하고, 이러한 과실이나 중과실까지 면책한다는 약관은 보험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상법에 의해 무효라고 법원도 판시하고 있다.


[상법 제732조의 2]

사망을 보험사고로 한 보험계약에서 사고가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나 보험수익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생긴 경우에도 보험자는 보험금액을 지급할 책임을 면치 못한다.


[상법 제663조]

당사자간의 특약으로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나 보험수익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지 못한다.


약 한 달 뒤, 권 씨에게서 흥분 섞인 전화가 왔다.

​"지점장님! 금감원에서 연락 왔어요! 보험금 전액 다 준답니다!"

​금융감독원은 예상대로 같은 폭력행위더라도 '방어 차원의 대응'을 고의적 면책 사유로 보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에서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유를 설명했다. 면책약관에서 말하는 폭력행위는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행위도 고의적인 폭력행위가 있고 중대한 과실로 일어난 폭력행위가 있는데, 약관 해석상 고의로 인한 폭력행위만 면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피보험자 자신이 고의로 상해의 결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폭력행위를 유발한 것이거나 상해의 결과를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하고 감행한 소위 즉, 미필적 고의에 의한 상해만을 면책으로 봐야지, 상대방의 폭력행위에 대응하는 폭력행위는 고의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권 씨는 이후 허미순 설계사의 열혈 팬이자 충성 고객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먼저 시비를 걸었던 자전거 아재도 본인 보험사에 청구했다가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그분은 본인이 먼저 폭력을 휘둘렀으니 상해가 발생할 것을 충분히 예견한 '고의 사고'에 해당되어 이는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는데 상해보험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안 싸우는 게 최선인데, 만약 싸움 나더라도 절대 먼저 폭력 쓰지 말자.


"때린 놈은 다리 오그리고 자고,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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