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를 그린 자연을 사랑한 화가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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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여 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정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된 순천만정원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정원박람회를 비롯하여 각 지자체별로 다양한 정원박람회를 앞다투어 개최하면서 바야흐로 일상의 정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다. 인스타그램의 유행으로 아름답게 꾸민 정원 경관은 유명한 카페와 관광지의 필수가 되었고, 펜더믹으로 인한 집 콕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와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을 즐기고 경험하며 직접 가꾸는 일에 전에 없는 열정을 쏟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수준에 내놓아도 뒤질 것 없는 정원가들의 활약이 이 배경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조경과 정원에 대한 전문성이 확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관련 전문가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하다. 특히, 정원과 조경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사회적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정원 또는 조경 관련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정원사((Landscape) Gardener)는 정원을 조성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칫 나무와 꽃을 가꾸는 기술직 일꾼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건축과 원예, 조경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전문직이기도 하다.
정원 디자이너(Garden Designer)는 정원의 배치과 시설, 식물들을 종합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엄격하게는 정원사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나 예로부터 정원을 디자인하고 조성하고 관리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거니와 실재 현장에서도 서로의 일을 보완하는 관계에 있는 지라 일반적으로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는 현대적 조경의 기틀을 잡고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를 설계하여 ‘현대 조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레드릭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는 정원사가 정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좁은 뜻을 가지고 있어 공공영역의 전문성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예술성을 지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환경을 만든다는 면에서 건축가와 유사한 경관 건축가, 즉 조경가라는 새로운 전문가를 제안하였다.
최근에 들어서는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 정원의 공공성이 두드러지기도 하거니와 조경가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정원과 조경을 넘나드는 활동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조경가까지 아우르는 보다 관용적인 기준으로, 그러나 정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전문 정원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영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조경기술사이자 예술의 전당, 올림픽공원, 선유도 공원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조경공간을 설계하고 조성한 조경계의 대모이다. 그녀의 화려한 이력을 생각하자면, 작업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작은 정원가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스스로 땅과 풀과 나무와 사람과 시와 그림을 생각하며 ‘땅 위의 시인’ 이라 불리는 정원가 이기도 하다. 하이데거, 헤르만 헤세와 같은 철학자와 예술가가 사랑하던 산책로를 두내원의 정원으로 옮기었고,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울며 응어리를 풀어낼만한 아산병원 안의 숨겨진 숲 공간을 만들어 냈으며 고스란히 보존된 낡은 건축의 흔적들이 쓸쓸함을 이겨내며 자기 본연으로부터의 위로함을 북돋게 하는 선유도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녀의 정원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 곧,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를 기본으로 한다. 산 넘어 산이 있고 계절 따라 색을 달리하는 초원과 같은 논이 있는 우리나라의 경관미가 바로 이러하다. 지금도 하루에 몇 시간씩 앞마당의 풀을 뽑고 꽃을 다듬는 그녀가 가진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순수함은 정원가의 표본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그녀를 첫째로 꼽고자 한다.
* 정영선 조경가는 조경계의 최고 영예상이라 할만한 세계조경가협회(IFLA)의 ‘2023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였으며, 그녀의 조경 철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가 개봉되기도 하였다.
* 정영선의 작품은 수 없이 많으나 최근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경북 군위에 있는 사유원을 들 수 있다. 사유원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은 일본으로 반출될뻔한 108그루의 커다란 모과나무를 되살리어 조성한 특별한 공간이다.
황지해 정원가는 첼시 플라워쇼에서의 연속 수상을 통해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은 정원 디자이너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건축분야에서 환경미술가로서 활동하던 그녀의 이력은 해외에서 열리는 정원박람회에 한국 산야의 본질적인 매력을 그대로 옮기어 낸 당당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한국 산과 잡초의 잠재된 가치, 자연의 원시성이 인정받은 것이고 나는 전달자일 뿐’ 이라는 작가의 수상 소감은 그녀가 조성하는 정원에 대한 생각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한국의 산야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언어이자 스펙터클한 영화이다. 여러 시대를 거쳐 여전히 매우 한국적인 풍경인 ‘해우소’, ’DMZ’ 그리고 ‘지리산’의 공간이 세계적인 정원으로 재현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지나는 바람까지 무척 사랑하신 어머니의 감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는 그녀, 그래서 그 작품들이 더욱 조심스럽고 섬세하며 아름답다.
* 황지해 작가는 여전히 국내외 다양한 정원박람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4년에는 고양꽃박람회와 경기정원문화박람회에서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25년에는 청주 가드닝 페스티벌(25년 5월 9~11일)에서 정원 디자인과 시공에 참여한다.
천리포수목원의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장훈 정원사는 지금도 정원을 조성하고 가꾸며 소개하는 일을 하는 대표적인 시민형 정원가이다. 천리포수목원, 평강수목원, 미국 롱우드가든과 수원수목원에서의 시간을 거치며 선진적인 정원 문화를 소개하고 시민 정원사를 조성하는데 앞장서온 그는 특별히 겨울 정원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유명하다. 정원 디자이너 마리안네 푀르스터의 말을 빌려 ‘2월 말부터 4월까지의 초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봄을 즐길 자격이 없다’ 라고 말하는 그는 자칫 무시되기 쉬운 우리나라 겨울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더 좋은 가드닝으로 더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김장훈은 ’더 살아있는 자연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도시의 정원을 가꾸고 있다. 플랜테리어와 반려식물이 유행하는 요즘, 정원과 식물에 대한 그의 해안과 여유로운 설명은 우리네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연을 들이는 가드닝’에 대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겨울정원의 최고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따뜻한 해안가에 있어 사철 푸른 상록활엽수와 남부 수종들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천리포 수목원에서 개발하고 수입한 특별한 식물들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땅이 차갑고 회색빛에 눌리는 차가운 겨울에도 다양한 색감과 질감으로 여러 경험을 선사하며 남모르게 봄의 기운을 준비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