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인물을 즐겨 그린 여성 인상주의자
‘차라리 네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게 낫겠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여행을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 체류하며 예술을 접했다. 특히, 1855년 Paris World’s Fair 에서 당대의 화가 외젠, 코로 그리고 피카소와 드가의 작품에 큰 감동을 받아 ’직업‘으로서의 화가를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결심에 막상 아버지는 ‘죽는 게 낫다’라며 크게 반대하였지만 메리는 15세가 되던 해 펜실베니아 미술 학원에 등록하며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고 20대 초반, 파리로 옮긴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살롱(Salon)’ 전에 입상하며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나는 그곳에 종종 찾아가서 코가 납작하게 될 때까지 창문에 붙어 그의 작품에서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흡수하려 했었다. 이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비로소 내가 원했던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_ 에드가 드가의 작품에 대한 메리 카사트의 평가
이후 몇 년 동안 줄곧 살롱전에 출품하였지만 줄곧 고전적인 화풍을 중시하는 당시 평단에 큰 회의를 느꼈으며, 특히 심사위원들이 그의 작품을 연달아 낙선시키거나 작품의 구체적인 수정까지 요구하자 살롱전과의 인연을 끊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그녀가 푹 빠져 있던 에드가 드가와의 인연도 영향을 미쳤는데, 아카데믹한 주류 미술계를 거부하는 인상주의자의 생각에 동의하며 에드가의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녀의 작품은 살롱전의 그것에 비해 화면이 밝아지고 붓 터치가 훨씬 자유로워진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표작의 하나인 ‘푸른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는 에드가 드가가 그림의 구도와 배경을 조언한 작품으로 아이의 자연스러운 포즈를 그대로 살려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상주의자로의 본격적인 변신 이후, 메리 카사트는 특히 정원을 배경으로 하는 인물화를 즐겨 그리곤 했다. 고전 화풍과의 절연을 선언할 정도로 담대한 그녀였지만, 당시 상류층 여성이 카페나 술집, 거리의 밤 풍경을 자유롭게 다니며 그리기는 어려웠기에 ’정원‘은 빛의 변화를 ‘가장 안전하고 세련되게’ 관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야외 공간이었다. 그녀는 특히 햇빛이 사물에 부딪히며 산란하는 효과에 깊은 관심이 있었는데, 정원의 꽃과 나뭇잎에 굴절되는 빛이 인물의 피부와 의상에 어떻게 맺히는지를 집요하게 재현하곤 하였다.
때문에, 카사트의 정원그림에는 빛을 담아내는 배경으로서 ’정원‘과 교감하는 인물이 중심이 되는데, 주로 당시 상류층 여성들의 일상을 그려내곤 하였다. 특히, 그림 속 정원은 식물이나 담장으로 둘러싸여 ‘사적이고 구분된 평온한 일상’을 잔잔하게 연출하고 있다.
메리 카사트는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다. 인상주의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베르트 모리조가 결혼과 그림을 동시에 해냈지만(물론 남편은 화가 에드와르 마네의 동생이다!), 여전히 여성으로서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 출산과 육아를 담당해야 하는 결혼생활은 당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신, 메리 카사트에게는 파리로 이사와 함께 살았던 언니 리디아가 큰 힘이 되었는데, 리디아는 오래된 신장병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메리 카사트의 수많은 걸작 속 뮤즈가 되어 깊은 예술적 교류를 나누었다.
메리 카사트는 정원에 앉아 있는 언니의 여러 모습을 담아냈다. 때로는 뜨개질을 하거나 책과 신문을 읽기도 하고, 계절의 변화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리디아의 얼굴은 주변의 빛을 받아내며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진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 그럼에도 함께하는 시간의 아름다움 그리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정원의 다채로움이 리디아를 옮겨내는 메리 카사트의 붓질을 상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