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시시하다.
벽에 바나나를 붙이면 예술이라느니 점 하나 찍은 종이가 몇십억이라느니.
현대 미술은 이렇게나 심플하다. 옛 르네상스 시절처럼 신도 감탄할만한 미적요소가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내가 태어난 90년도쯤에 이런 현대 미술이 서서히 우리 일상에 퍼지기 시작했고 새천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축, 제품, 환경 등 미니멀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체리색 몰딩과 노란 장판을 버리고 대리석 아트홀과 흰색 주류인 도배로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형태력, 미켈란젤로의 표현력에 빠져들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뭐가 뭔지, 대체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하단 건지 관심도 없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압도적인 기술력.
그렇게 나는 실사에 빠져들었다.
엄마가 벽 한가득 전지를 붙여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키우셨고 학교에선 온갖 종이에 그림만 그려댔다. 그게 재밌었다. 더 똑같이, 더 사실적으로, 더 잘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묘, 디자인, 수채화, 수묵화, 유화까지 하고 나니 조각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되었고 조형에서도 상위권 실력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에겐 노력하고 수련해야 되는 시간이라기보단 재밌는 미술놀이였다.
옆자리에 제일 잘하는 친구를 앞지를수록 도파민은 터졌고 이렇게 잘하는 것이 예술의 전부였다.
'미술'은 '아름다울 미'에 '재주 술'이니 당연히 그저 아름답게 그릴줄 아는 실력,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미술대학에 진학해 더욱더 실사에 파고들었다.
더 사실처럼. 내가 창조하는 다른 사실 세계에 집중했다.
신이 되고 싶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똑같은 것을 순간에 창조하고 싶었다.
2016년, 25살에 실제 사람 크기의 식모(植毛)를 한 [스마트폰을 하는 이황]을 졸업작품으로 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정식으로 약 15년간 실사에 매달렸다.
극사실주의는 가장 궁극적인 미술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극사실을 추구하는 철학은 단지 그게 미술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능력을 최대로 발현하는 것이 미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시하고 공감되지 않는 아무런 철학을 내세워 기형적인 추상표현을 늘어놓는 예술병 환자들을 경멸했다. 시각적인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눈앞에 보이고 느끼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의 참된 재미라고 단정 지었다.
이렇게 나의 '미술(美術)'철학은 말 그대로의 '미술(美術)'을 실현시키는 것이었고 그런 내 철학을 응원하듯, [스마트폰을 하는 이황]은 졸업전시를 하자마자 인사동에서 열린 큰 규모의 전시 공모에 바로 당선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삼성에서 연락을 받기까지. (일은 진행되지 못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궁극적인 '미술 가치'에 가까우며 엔터적인 요소를 섞어 대중이 쉽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여러 공장을 다니며 서태지 전국투어 무대제작, 대형 조형물 제작, 실사피규어 헤드스컬퍼, 3D 실사 모델링까지 외부의 상업적인 요소를 흡수했다.
더 대중적이고 더 화려한 기술을 얻기 위해.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실사피규어 회사 '(주) HotToy'에 입사하게 된다.
이 이야기 또한 상당히 재밌는데, 나는 네이버로 끌려간 기안 84처럼 회사에서 살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합격자 면담자리에서 대뜸 회사에서 살면 안 되겠냐고 제안한 나를 매우 심각하게 쳐다보시며 걱정하던 홍진철 대표님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의 질문에 그냥 "네"라고 대답한 나는 그저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싫었고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절대 집에 들어가지 않는 망할 자식새끼일 뿐, 다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아무대서나 잘 수 있는 미대생의 능력을 발휘해 그냥 사무실 책상 아래서 자고 양치만 할 수 있다면 좋았다. 그런데 대표님이 회사 직원 휴게실을 싹 치우고 간이침대를 놔주시며 여기서 생활하라며 공간을 주시는 게 아니겠는가. 당시엔 이 회사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들이 이상하게 보는 건 둘째치고 그들의 휴식공간을 멋대로 뺏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민폐였겠는가.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나는 그 회사에 입사한 것 만으로 외국인들에게 페이스북 친구신청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신입 초짜도 봐주는 회사의 단단한 코어팬들이 신기했다.
사실 나는 피규어에 흥미가 없다. 그저 인체를 '잘' 만드는 홍콩 기업이란 곳을 경험해 보고 더 능력을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철학은 끝이 났다.
나의 옆자리 옆옆자리 선배들의 헤드작업은 내가 이제까지 봐오던 그 어떤 실사와 비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엄지손가락 한마디 만한 얼굴에 모공과 살결을 넣고 해당 인물과 똑같이 보이기 위해 표정의 근육덩어리와 전반적인 이미지를 모두가 구현하고 있었다.
그때 모든 흥미가 떨어졌다.
잘하는 것의 끝판왕, 그 무기는 나만 가지고 나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극사실표현은 정답이 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사람이라는 정답이 있고, 고양이를 사실적으로 만드는 거라면 고양이라는 정답이 있다.
정답은 80%, 99% 라는 것이 없다. 정답은 100% '정답(正答)' 그 자체다.
1+1=2 다. 나는 2를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2라는 정답은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실현시킬 수 있다.
작은 사무실 공간에 있는 모두가 정답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현대미술이 시시한 것처럼 극 사실주의가 시시해졌다.
누구나 끝을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도전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는 금방 그만두었다.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술 작품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철학이 무너졌으니 아무런 동기나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매년, 매해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위해 기초를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열망이 생겼다. 만들어 내고 싶었다. 내가 꿈꾸던 학교,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는 학생을.
서울대 시험은 꽤나 까다롭다. 방대하고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가장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벼움과 무거움을 표현하시오'라는 질문에 조형과 드로잉, 면접으로 나누어 보여줘야 한다.
나는 서울대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매일 질문했다.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해?"
순수하고 작은 세계의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듣고 싶어 했다.
이 질문의 정답이란 없는데.
나는 그저 너의 생각이 궁금할 뿐인데,
왜 너희는 정답을 바랄까.
어린 나와 똑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근본적인 자아가 튼튼할 때 나의 가치판단이 생겨나고 거기서 나의 철학이 나타나며 그것이 단단해져 결국 나라는 개성의 인간을 만드는 것을.
이 가치가 이타적이며 범지구적으로 공감을 살 수 있고 나 또한 그것을 순수하게 이행하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더 멀리 내 생각이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아실현을 한다.
단 한 번도 현재의 육체, 환경, 정신을 갖춘 삶을 두 번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하루하루가 처음인 날들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고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다.
나도 내가 처음이고 내 친구도 내 친구로 사는 하루하루가 처음이다.
이렇게 우리는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창의적이다.
어른들은 편견과 도식적 사고방식에 갇혀 당연한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살아온 경험이 적어 가치판단을 단단하게 세울 시간이 부족하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가치판단이 단단하다.
아이들의 창의성과 어른의 현실감각이 만나게 되면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가지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근본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심리에 대한 재밌는 공부를 했다. 나의 선생님은 오은영박사님으로, 약 20여 년의 아동 청소년부터 부모의 행동, 자신도 모르는 감정과 행동의 원인 등 , 수많은 영상을 몇 년간 전부 몰아봤다.
나름 특이한 소녀로 항상 겉돌았던 어린 날, 나의 부모, 나의 환경, 나의 기질, 나의 성격, 나의 방어기제, 지능검사까지.
왜 내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으며 지긋지긋한 우울증은 8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부어 약을 장기에 쑤셔 넣어도 나아지지 않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나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했다.
그렇게 심리, 종교, 과학, 역사, 명리학에 몇 년 동안 몰두하게 됐다.
이유는 단지 나에 대한 것이 궁금했다.
'진짜 나는 무엇일까'
그리고 2022년 10월, 다 내팽개치고 혼자 칫솔만 들고 공항으로 달려가 가장 먼 직항 비행기를 보고 떠난 암스테르담에서 해답을 얻었다.
'나는 자연이다.'
나는 경오년에 태어난 자연 에너지원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굉장히 복잡한 고리의 고리가 엉킨 실뭉탱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할수록 실타래는 더욱더 엉키며 점점 크기를 확장해 나간다.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이 무한대이며 리셋을 반복한다.
그러기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리셋과 동시에 인연법을 만들어 끊을 수 없는 고리가 형성된다.
부처가 말한 윤회의 끝을 보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내가 절대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야 한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자연과 함께 흘러갈 때 나의 자아의 힘은 강력해진다.
누군가 가슴속에 답답한 돌멩이를 망치로 깨부슨 것처럼 한순간에 시원해지며 명쾌해졌다.
'나는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제발 일찍 들어오라며 흠씬 매타작을 해도 끝까지 놀았다.
집에 부도가 나서 빨간딱지가 붙고 낡은 집으로 쫓겨날 때도 강사일을 하며 꾸역꾸역 미술을 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기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재밌어했으면 좋겠다.
더 편하게 재밌게 살고 싶다.
지구가 너무 작다.
파란 약을 먹은 나는 그렇게 한 꺼풀 벗겨졌다.
마냥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돼야지, 유명해져서 권력을 얻어야지- 가 아닌, 재밌으니까.
내일을 살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획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인생의 수많은 재미요소들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재미, 곧 나의 철학의 완성.
그리고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배운 것은, 내가 재밌는 것은 돈이 된다는 것.
작가의 말이나 미술작품을 설명할 때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며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문장들로 범벅한 글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런 오래되고 "있어 보이는" 방식은 쓰고 싶지 않다. 베베 꼬인 단어를 나열하는 방식을 쓰지 않고 담백한 문장으로 작가의 말을 쓰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예술'을 설명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가상의 현실까지 구현되는 지금, 예술이란 한 개체에서 나오는 방대한 정신세계를 간단하게 구현한 것을 말한다.
-영화, 만화, 드라마, 글, 미술, 음악, 무용 등 직관적인 감정에너지를 앞의 매개체를 통해 표현, 드러내는 방식을 뜻한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수도 없이 정의할 수 있지만 모든 문장의 핵심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주 창의적인 '철학'이 있어야 예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철학은 '참 나'를 깨우칠 때 발현된다.
다수의 에너지원들이 '참 나'를 궁금해하고 흥미로워할 때 예술가는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성장을 지켜보는 것 또한 상당한 재미가 있을 거라고 자부한다.
오늘을 만든 건 단단한 '기초'다.
매번 기초를 반복해 오며 느낀 건, 슬럼프는 기초가 단단할 때 극복된다.
나의 철학이 흔들릴 땐 나의 기초, 근본을 알아야 답을 얻는다.
내가 멸시했던 현대미술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고, 점 하나 찍은 이우환의 작품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이나 현상, 이데올로기 등을 표현하는 철학적 작품이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애초에 시대적으로 예술 사조를 만들어 낸 천재다.)
'기술'에서 '예술'로 오기까지,
그렇게 나의 진짜 예술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