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물건
가로 80센티미터 세로 50센티미터쯤 될까. 다리가 넷 달린 직사각형 밥상. 옻칠의 광택은 죽고 네 귀퉁이는 칠마저 벗겨져 나무 살이 언뜻언뜻 보이던 상. 그 상은 밥을 먹을 때 말고는 부엌 연탄 아궁이가 놓인 쪽 벽에 걸려 있었다. 상이 거기서 끌어내려져 부뚜막에 앉혀져 상판 위에 식구 수대로 밥그릇과 찬이 놓인 뒤 답삭 들려 가겟방에 놓이고 식구들이 밥상을 떠나면 다시 벽에 걸리고 하기를 하루에 최소 세 번. 외식도 소풍도 없었던 궁벽한 살이였으니 밥상을 움직인 엄마의 손은 삼십여 년 사이에 얼마나 야위어갔을까.
엄마가 차려낸 밥상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와 나, 남동생 둘에 보태어 기사와 육촌 오빠까지였다. 내가 열 살 때부터 전파사를 해서 생계를 꾸린 아버지는 수리 물건이 들어오면 밥때를 몰랐다. 특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고칠 때에는 있는 대로 신경을 곤두세우셔서 식구 중 누구도 아버지 그 둥그렇게 말린 등에다 대고 밥 차려 놨다는 말을 못 했다. 밥이 식고 국이 식어도 맥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엄마 속은 어땠을까.
나는 어땠나. 툭하면 또 된장찌개냐며 인상을 썼다. 고등학교 때엔 야간 자율학습으로 3년 내내 도시락을 두 개나 싸 갖고 다니면서 점심 저녁 도시락 반찬이 같다고 불평했다. 아파트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온 날이면 그 불평에 가속도가 붙었다. 부뚜막에 놓인 곤로도 보기 싫고 곤로 그을음에 시커매진 냄비까지 보기 싫었으니 음식은 말해 무엇하리.
전파사 일을 배운다고 시골에서 올라와 우리랑 숙식을 같이한 총각 기사들은 엄마가 해주는 밥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땐 육촌 오빠까지 일 년 와 있었다. 시골에서 농고를 나온 그가 대학 입시 학원을 다닌다고 올라왔다. 가게 천장에 붙인 다락방과 가게에 딸린 방 두 공간에 남녀로 나눠 자는 그 옹색한 공간에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몸이 나무 젓가락 같았던 엄마는 그의 도시락까지를 쌌다. 나는 그 오빠가 엄마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걸 엄마 장례를 치를 때 처음 들었다.
칠 벗겨진 밥상에 올랐던 엄마의 찬들을 예찬한 건 남들이었다. 학교 친구가 엄마가 싸줬던 멸치 볶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엄마랑 어릴 때 한동네 살았다던 아줌마는 엄마가 해주는 나물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장모님이 해 주는 된장찌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했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음식을 만들어 내는 일이 도대체 몸에 안 붙으면서야 그 말들이 들어왔다. ‘엄마는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구나. 어려서 어깨 너머로라도 좀 배울 걸 그랬나.’가 다였다. 남들한테 들은 찬사를 엄마한테 전할 줄 몰랐다. 엄마랑 살가운 대화를 나눌 줄 몰랐던 데다 당시에는 그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제 여기에 없다. 쉰 다섯의 나이에 엄마는 밥상을 두고 이승을 떠났다. 엄마의 그 수고와 솜씨에 값하는 인사를 할 기회가 이젠 없다.
남루한 부엌과 허름한 밥상, 그리고 거기에 얹힌 엄마의 고단했던 생애가 맴돌면 나한테 화가 난다. 엄마한테 어쩌면 그렇게 그 고된 수고에 고맙단 인사를 한 번도 하질 않았을까. 그게 그렇게 남사스러워서 못 할 말이었다면, 남들이 엄마 손맛이 좋다고 하더라, 했더라면 좋았을걸. 내 생각에도 좀 그런 거 같다고 우물거렸다면 좀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