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프라하 그리고 해커

ㄷ의 침투

by 김용석

회사 연구원들이 KT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종종 대전으로 출장을 가곤 했습니다. 연구소로 출장은 가지만 전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이고 무릎 연골까지도 이학이나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러니 막상 출장을 가서도 별 할 일 없이 앉아있다 퇴근 시간 되면 '와~ 끝났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하는 게 제 일이었죠.


문제의 날도 평범하게 대전을 갔고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문제라면 며칠 전부터 대전에서 사용하던 노트북이 버벅거린다는 느낌 정도? 근데 그날은 버벅거리던 컴퓨터가 오후부터 완전히 맛이 가서 문서작성을 좀 하려고 하면 계속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상황이 이러니 컴으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모든 전자기기는 껐다 켜면 좋아진다는 바이블을 믿고 껐다 켜도 좀 있다가 다시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이러니 도저히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고 혹시 바이러스나 해커가 들어온 게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쫌 신나기 시작했습니다.

난 바로 팀장에게 제 PC의 상황을 알렸죠!

"해커가 들어왔나 봐~ 잡아줘~~~!"

이 팀장이 최고 엔지니어라고 맨날 칭찬받는 아주 똑똑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제가 해결할게요" 하더군요! (얼마나 믿음직하던지~~) 그러면서 문제의 제 노트북을 들더니 갑자기 PC의 전원을 뽑는 겁니다. 뭐야! 왜 전원을 뽑지? 아... 맞아 맞아 먼저 유출되는 데이터를 막아야지! 역시~~ 역시~~


저는 막 상상을 했습니다. 모니터에 알 수 없는 텍스트나 숫자가 떴다가 사라지고, 팀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해커와 머리싸움을 하며 자판을 두드리고, 해커의 서버 IP는 싱가폴->발리->뉴욕을 거쳐 프라하의 어느 허름한 술집의 IP도 잠시 잡히고 얼마나 드라마틱했던지 심장이 쿵쿵쿵... 상상만 해도 멋졌습니다!


상상 속에선 땀을 뻘뻘 흘리는 팀장 주위에 동료들이 모여들어 화면을 계속 초조하게 주시하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면이 확 바뀌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멋진 결말! 팀원들은 화면을 보며 모두 박수! 환호성! 이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근데 이 친구 갑자기 제 상상과는 다르게 노트북을 거꾸로 들더니 막 흔들더군요... 그리고 한마디


"ㄷ자 밑에 종이 꼈어요~~~"


헉... 내 상상은... 프라하는 어쩌라구...

아주 조그마한 종이 뺐더니 노트북 무척 잘됐습니다...ㅠㅠ


그날 저녁 대전 맛있는 횟집에서 팀장에게 초밥 사주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물론 프라하 얘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