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어떤 나무들은》을 읽고

by 이우주


정원에게.


나는 지금 빨간색 손난로를 쥐고 있어. 여섯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눈雪의 결정들과 선물 꾸러미가 들어갈 만큼 발목 넉넉한 양말이 그려진 손난로를 쥐고 있자니 손 안에 크리스마스를 담고 있는 기분이야. 그냥 그렇다는 거야. 아쉽게도 (정말 아쉬워 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설렘이나 기쁨 같은, 축제를 기다리는 달뜬 마음은 없어.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너무 무성의한 건가 싶을 때면 학생 시절, 성탄 전야에 올릴 무대를 준비하느라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화음을 맞추고 동작을 살피던, 깔깔거리며 떡볶이와 콜라를 나누어 먹던 12월을 생각하며 그래도 즐거웠던 시절을 보냈으니 할 바는 하지 않았나 생각할뿐이야.


지난 주말 캄캄한 저녁에 성당에 갔더니 앞마당에 구유를 꾸며놓았더라. 성탄에 이르지 않았으니 아직 아기예수는 없었지만 노란빛 전구 둘러진 구유를 보며 어린이들이 기뻐했어.

어렸을 적 나는 예수가 조금 불편했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그 남자는 언제나 슬퍼보였고 많은 것을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고 무엇보다 외로워보였으니까. 동생을 골려먹거나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한 사람을 잡아 삼킬 만큼 무거운 것인지를 생각하다보면 글쎄,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런 내게 돌아온 대답은 원죄였어. 먼 옛날 아담과 이브라는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갖게 되었다는 죄.

어떻게 생각하니. 내 의사 없이 빚어진 내가 세상에 가지고 나온 죄라니. 어떤 죄를 지을 수 있었다는 걸까. 출처도 까닭도 알 수 없는 죄를 회개한다는 것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있나. 회개한다 해도 사해지지 않을 죄를 일평생 안고 살아가라는, 죄책감이라는 숙명을 살아가라는 응답에 고개 끄덕일 수 있니.


최승자 시인은 나이 마흔 넘어 미국 아이오와에서 몇 달을 머물며 일기를 썼어. 사람과 섞여 지내는 것이 익숙지 않은 성정에 이벤트도 많고 소란스럽기도 한 미국에서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생활에 많이 당황해하지만 평생을 갇혀지내던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와 그 안의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와 그동안을 살펴보게 돼.


시인은 자신이 언제나 불행했고 무엇을 시작하기엔 이제 늙었다고,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고, 그리하여 현재는 감옥이라고, 미래 또한 닫혀있는 감옥이라고 생각해왔대. 그런데 새로운 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 구조와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거야. 지금까지의 불행과 체념은 이 사회가 역사와 전통, 계급과 통념, 상식과 권력, 학교 같은 것들을 이용해 시인이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도록 만들었고 자신의 감수성과 사고력 또한 일생을 프로그램화된 것들(그렇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짜여진)에 충실히 순응한 결과라는 걸 말이야. 그러면서 시인은 말해.


"이제 나는 그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강요되었던 가치관의 정체를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현재를, 미래를, 시간을 더이상 감옥으로 보지 않게 될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어떤 나무들은』 370쪽, 최승자

나는 원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원죄라는 개념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다만 그것이 누군가 나를, 내가 나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프레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또, 최승자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각자의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선 그동안 인식하지 못한 채(우리에게 인식할 기회와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채) 사회가, 이데올로기가,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우리의 무의식 중에 심어놓은 프로그램들을 인식해야 한다는 거야. 어려서부터 당연하게 보고 들어온, 주입받아온 낡은 잣대를 아무 의심없이 자신과 타인에게 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실패나 패배로 규정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살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말이지.


우리는 서로를, 스스로를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존재로 여기고 힘껏 축복해야 해. 크리스마스를 맞는 어린 아이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이번 성탄은 그 마음으로 예수의 탄생을 기다려보려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낮은 곳에 있던 이들의 가능성을 믿어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을 덮고 있던 프레임을 깨부수고, 어떻게도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은 눈으로 이웃을 보아준 그는 어쩌면 내가 짐작한 것만큼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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