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는 책방지기다. 나는 무보수 서점원이다. 내 꿈은 먹고 살 걱정 없이 직장 그만두고 책방일만 하는 것이고, 하다의 꿈은 내 월급을 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어 나를 고용하는 것이다.
책방 수입으로 근근이 월세를 내고 있는 우리는 마음껏 책을 들이지 못한다. 신중히, 엄선한 책을 한 권씩만 들인다. 어느 날 하다가 결연한 눈빛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려놓으며 몹시 공식적인 자세로 선언했다. "이건 꼭 들여야겠어." 박경리 선생의 『토지』 전권이었다. 20권...이나? 우리에게 너무 큰 구매 아닐까, 20권을 다 사갈 사람이 있을까, 반박하려 했지만 하다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자마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것은 무려 '박경리 × 반 고흐' 컬래버레이션이었다. 『토지』 스무 권의 표지를 고흐의 그림으로 양장한 전권 세트. 팔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 스무 권이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책방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반 고흐를 입은 박경리의 토지’가 도착한 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아, 그 아름다움이란. 문학과 그림으로 가득찬 스무 권의 충만감. “나 이거 퇴직금으로 줘!” 처음으로 하다에게 보수를 요구했다. 내 방엔 이미 스무 권의 『토지』가 있었지만 정말이지 그 새로운 『토지』를 갖고 싶었다. 왜? 하다는 왜 없는 살림에 그 큰돈을 들였고, 나는 왜 평소의 생활방식인 미니멀리즘을 거스르는 풀×풀 소유를 원했을까. 『토지』가 뭐기에?
집필기간 25년, 200자 원고지 4만여 장, 등장인물 600여 명.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까지 쉴 틈 없이 격동하던 50여 년,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해 지리산, 진주, 부산, 서울, 간도 러시아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최참판 가문과 그 소작인들의 가정사부터 동학운동, 개항, 갑오개혁, 일제강점기, 3·1 운동, 독립운동을 독자의 눈앞에 생생히 펼쳐 보여주는 소설. 600여 명의 인물 저마다가 제각기 살아있고 배경이 되는 지역마다의 언어가 구성지게 담겨 있는 소설. 광활하고 촘촘한 소설.
이 소설을 써낸 작가, 박경리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냈을지, 무엇보다 『토지』를 쓰는 세월이 그에게 무엇이었을지 알고 싶었다.
선생과 관련된 문학 공간은 세 곳이다. 생전 거주한 집과 집필실, 손수 가꾸던 텃밭을 보존한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 선생이 나고 자란 고향이자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 통영의 '박경리 기념관', 『토지』의 주요 배경인 평사리에 세워져 선생의 유품과 『토지』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 우리는 하동으로 가기로 했다. 하다가 꼭 먹고 싶어하는 생선까스 잘 하는 집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