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신동엽 시인의 고향 부여는 내게 정다운 곳이다. 넉넉히 펼쳐있는 논과 들 사이로 느긋한 금강 흐르고 그가 쓴 <서시>의 시작처럼 아담한 산들 드믓드믓한 곳, 도시의 조급과 위협에서 놓여나 안도할 수 있는 곳이다. 특별한 시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 금동대향로나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곳, 미적 풍요로움으로 충만할 수 있는 곳이다. 초록이 푸릇한 계절, 부소산성을 걸으면 오랜 역사를 안고도 싱그러운 생명을 감각할 수 있는 곳이며, 계절 깊어지는 가을이면 예스러움 그윽한 곳이다.
신동엽에게 고향은 절대적인 곳이었다. 아름다운 곳, 안전한 곳, 생명이 깃들어야 하는 곳, 지켜져야 하는 곳, 돌아가야 하는 곳. 구슬처럼 냇물이 흐르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미치지 않는 폭 십리의 완충지대.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 가꾸기 위해 맨발로 콩알을 터는 곳.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과 기생충의 허식에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야 하는 곳(*).
신동엽의 유년은 기근과 가뭄으로 고된 시절이었다. 너나없이 가난했지만 어린 신동엽은 고향에서 누이들과 풀을 뜯고 꽃을 구경했다. 냇가에 둘러앉아 발 담그고 빨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전했고 정자나무 아래에서 공동체의 온기 담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자랐다(*).
일제강점기의 조국 찬탈과 식민자 찬양, 해방 후 독재자의 헌법 유린과 민주주의 삭제, 동족끼리 쏘아 죽이던 한국전쟁, 자본주의의 인간성 착취를 모두 겪은 그에게 태초이자 자궁과 같았던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 도착해야만 하는 유토피아였다. 고향을 노래한 그의 시들엔 이념과 폭력에 훼손된 민중을 그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하는 절박함과 서글픔이 눌러담겨있다.
그때로부터 60년, 8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독재를 꿈꾸는 자는 살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정치인들은 정권 쟁탈을 위해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며 국민을 가른다. 최상의 가치가 된 자본은 유일신이 되어 노동자를 죽게 한다. 그대로인 폭력들.
이미 죽은지 오래인 시인은 여전히 참담할까.
껍데기의 소멸을 명령한 그의 시를 배우고 자란 이들이 우리가 함께 깃들 고향, 다음 세대를 품고 키워낼 고향을 지켜내고 있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국가에서 감히 계엄을 선포한 자의 악행을 막기 위해 맨몸으로 무장한 군인 앞에 섰다. 공권력이 억압하는 힘 없는 이들, 장애인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 현장으로 달려갔다. 냇가에 둘러앉아 빨래하던 모습으로 광장에 모여앉아 우리가 함께 믿고 있는 신념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들을 발언하고 경청했다. 정자나무 아래서 두레를 나눠 먹던 것처럼 춥고 외로운 곳에서 싸우고 있는 또다른 우리들에게 온기 담은 음식을 차려주고 보내주었다.
대통령은 그저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인 곳, 작업복 뒷주머니에 기름 묻은 하이데거와 러셀, 헤밍웨이와 장자의 책을 꽂고 퇴근하는 광부들이 사는 곳, 대학 나온 농민들이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히 아는 곳, 어린이들이 사람 죽이는 시늉 하지 않고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곳(**)을 꿈꾼 시인, 얼마쯤 괜찮지 않을까.
* <향아>,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 밤은>
** <산문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