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문학관이 얼마나 되겠어, 하며 온라인 지도 사이트에서 '문학관'을 검색했다. 아니, 이거 왜 이러지? 왜... 많지? 문학관을 가리키는 빨간 동그라미들이 대한민국 전역에 점점이 박혀있었다. 얼추 세어보니 160여 개.
첫 번째 질문, 문학관이 왜 많은 거지? 두 번째 질문, 이렇게 많은데 왜 난 몰랐지? 남들 비싼 옷 사 입고 맛집 투어 자랑할 때 문학을 향유할 줄 아는 내 삶이 더 근사하지 않나 내심 우쭐했는데 끝없는 문학관 목록이 당황스러웠다. 좀 더 솔직히는 커다랗던 애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쪼그라들었다.
내가 나고 자라 이제껏 살아온 충청권에만도 여럿 있었다. 모두 이름난 작가들의 문학관이었다.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 문학관도 지척인 부여에 있었다. 반갑고 놀라워 하다에게 바로 전했다. “그래? 신동엽?” 하다가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이쯤되면 하다의 고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번 문학관 유람은 부여로 가자는 제안에 하다는 언제나처럼 흔쾌히 오케이.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부여에 문학관도 있어?”
문학관을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9일이었다. 1960년에 있었던 4.19 혁명은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위해 투표를 조작한 것이 도화선이 된 시민의 반부정, 반정부 항쟁운동이었다. 대한민국 그 자체인 국민을 기만하고 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비리는 그 전부터 갖가지 형태로 시민의 목숨과 정신을 훼손하고 있었다.
‘4월의 시인’으로 불리는 신동엽은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의 시를 모아 『학생혁명시집』을 펴냈고 그 혁명의 정신을 눌러 담아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산에 언덕에> 같은 시들을 발표했다. 마땅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부정의에 저항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무기를 날카롭게 벼리어 혁명에 뛰어든 것이다.
신동엽의 사월의 시들엔 당시 그를 지배했던 정념들이 짙게 배어있다. 불의에 대한 분노, 정의를 향한 희망이 이 시인을 지탱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시를 읽을수록 그의 정념이 시작된 곳이 확실해졌다. 민중에 대한 사랑. 봄이 오면 가난 속에 앉아 시퍼런 풀줄기를 우그려 씹고 있는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이슬비 오는 밤 등허리에 비에 젖은 고구마를 진 채 길을 묻는 어린 소년(**), 부은 한 쪽 눈으로 양지에 기대 앉아 때 묻은 편지를 읽는 창녀(**), 고층 건물 공사장에서 자갈 등짐하다 허리 다쳐 쓰러진 남자(**). 고통에 갇힌 그들의 불행을 바라보는 시인의 복잡한 심정은 분노가 되고 희망이 되어 이윽고 시가 되었다.
‘그 모오든 쇠붙이’를 거부하고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겠다던 사월,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난다던 사월, ‘미치고 싶었다’던 사월. 6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사월은 대지의 모든 생명력이 폭발하듯 연둣빛으로 발하고 있었다. 4.19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그가 노래한 것처럼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리며 맞서 싸웠던 이들이 산에 언덕에 화사히 피어나있는 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어쩔 수 없이 서글퍼졌다.
ㅇ (*) - <사월은 갈아엎는 달>
ㅇ (**) - <종로5가>
ㅇ ‘그 모오든 쇠붙이’,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 - <껍데기는 가라>
ㅇ ‘미치고 싶었다’, ‘산천은 껍질을 찢고 -’ - <사월을 갈아엎는 달>
ㅇ ‘엄숙한 세상을 -’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