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시문학관 3

by 이우주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한 점을 그려내는 마음을 짐작해 본다. 자신의 머리칼을, 눈썹과 콧날을, 턱선과 입매를, 말을 담은 눈동자를 관찰하는 마음을.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마음, 나의 모든 것을 응시하는 마음을.


서정주는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는 존재로부터 자화상을 그려나간다. 아비일 수도, 조국일 수도, 시대일 수도, 어쩌면 시인 자신일 수도 있을 그것은 종의 신분이어서 주체가 될 수 없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했다. 그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시인의 이야기.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겨우 풋살구 하나를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실제로 시인은 집이 퍽 가난하여 종이 장판조차 바르지 못한 방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흙벽을 파먹었다 말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되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이어 받은 시인은 바람, 아무래도 방황과 고뇌, 부질없음과 충만함, 거친 결과 부드러움, 한스러움과 자유 같은 것이었을 바람을 해마다 통과하며 스물 셋 청년이 된다. 죄와 어리석음을 품어야만 살아낼 수 있었던 청년의 부끄러움은 몇 방울의 고통을 얹어 이윽고 시가 된다.


이 시를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연에 다다르기까지 몇 번이나 마음이 붙잡혀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시인의 자화상 여기저기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나, 혹은 나와 연관된 무엇이 밤이 깊어도 저 있을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몹시도 곤궁하여 간절한 것 하나를 갖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앞서 산 이들로부터 이어진 강인한 것을 지니고도 소용없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눈동자는 나의 무엇을 담고 있나. 숱한 타인들은 나의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들이 본 나의 조각들을 뉘우쳐야 할까.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시 대신 무엇을 빚고 있는가. 그 안에 섞어 넣을 나의 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


하다와 나의 다른 점 중 하나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가능한 만큼을 해결하기 위해 바로 행동한다. 반면 하다는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찾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도 다르다. 마음이 좋지 않은 날이면 나는 밖으로 나가 걷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린다. 하다는 안 좋은 기분이 자신의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골똘히 생각한다. 원인을 찾아낸 다음 그에 맞는 조치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은 상태로 돌아가는 데 드는 시간이 다르다. 대체로 내가 더 빠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아진 것일까.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나를 아직 알지 못하는데 괜찮아지는 게 가능한 걸까.

서정주의 <자화상>에 오래 붙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과 독대할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고 부끄러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 아직 그리지 못한 자화상은 여기에 적어두고 이제 나를 만나는 자리에 서는 시간.



허투루 보지 않기로

약속한 것만 보기로

거울 앞에선

헝클어진 머리칼만 보기

잠깐쯤은, 이마 위에 얹힌 말

보고싶기도 하겠지만

거둘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뿌옇게 흐트린 눈으로

삐죽한 머리칼만 보기


기어이 아침볕 거울에 닿으면

눈썹 사이 스미면

뉘우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혼자 괜찮을까


아침은 오고 있는데

사위는 새벽을 잡아보려고

이마를 가리고 말을 가리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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