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무서운 이유

"장난감 조립 잘하네"라는 한마디가 만든 20년

by 브로콜리

"우리 아들, 장난감 조립 정말 잘하네!"


어릴 적 부모님이 해주신 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미니카가 유행했다. 3000원짜리 미니카 조립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설명서를 보며 이것저것 맞춰볼 때마다 들었던 칭찬. 그 말이 좋았다.

중학교 때 진로를 고민할 때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그 말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기계를 다루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나는 기계공학과에 진학했고, 석사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부모님의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의 20년을 만든 셈이다.

그런데 기계공학은 장난감 조립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기계공학은 장난감 조립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미적분학, 선형대수학, 공업수학, 열역학, 유체역학, 재료역학... 수업 시간표는 온통 수학과 물리로 가득했다. 손으로 뭔가를 조립하고 만드는 시간보다, 책상 앞에 앉아 수식을 풀고 계산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석사과정도, 박사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연구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모델링, 데이터 분석과 수치 해석으로 채워졌다. 내가 어릴 적 꿈꿨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적응했다. 공부도 잘했고, 연구도 제법 해냈다.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까.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해서 하고 있는 걸까?"


만약 다른 말을 들었다면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부모님이 "그림 정말 잘 그리네" 하고 칭찬해 주셨다면?

만약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쓰네" 하고 말씀해 주셨다면?

만약 "음악적 감각이 있는 것 같아" 하고 격려해 주셨다면?

나는 지금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까? 작가가 되어 있을까? 음악을 하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어릴 때 음악은 꽤 좋아했었다. 하지만 음악은 내가 직업으로 삼을 수 없는 거라 생각했고,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거기에는 시큰둥하셨다. 반면 '장난감 조립을 잘한다'는 말은 성장했을 때 존재하는 직업군이 있고, 부모님도 그런 부분을 잘 아시니 선택하기 쉬웠다.

후회가 되냐고? 가끔은 그렇다.

좀 더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했다면 어땠을까. 수식보다는 상상력으로, 계산보다는 감각으로 승부하는 일을 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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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정말 무서운 이유

그래서 말이 무섭다.

1960년대 한 유명한 실험에서, 선생님이 특정 학생들을 "잠재력이 높다"라고 믿게 했을 때 실제로 그 학생들의 성적이 향상되었다. 무작위로 선택된 학생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린 시절에 듣는 말은 특히 더 무섭다. 그 말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그 정체성이 선택을 만들고, 그 선택들이 쌓여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반복적으로 듣는 말과 받는 경험이 실제로 뇌의 신경 회로를 바꾼다고 한다. "조립을 잘하네"라는 칭찬이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내 뇌에 특정 자아상을 각인시킨 것이다.

부모님의 칭찬 한마디가 내 인생의 프레임을 씌웠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 프레임 안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했다

지금 나는 직장인이자 학생이다. 회사에서 일하며, 동시에 새로운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기대가 아니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다. 20년을 남이 만들어준 궤도 위에서 달렸다면, 이제는 내가 레일을 깔고 싶었다.


지금, 나는 글을 쓴다.

매주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수식과 데이터가 아니라 내 경험과 생각을 풀어낸다. 정해진 형식이 아니라 내 방식으로 쓴다. 길을 가다 잠을 자다 문득 글 쓸 주제가 떠오르면 메모해 둔다. 이게 바로 '창작의 행복'인가 하고 혼자 뿌듯해한다.

그리고 재밌다.

20년 동안 기계공학을 하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이다. '이거 재밌는데?' 하는 순간이 온다. 글을 쓰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다. 발행 버튼을 누를 때의 설렘도 있다.

'아, 이게 내가 좋아하는 걸 할 때의 기분이구나.'


이제야 알았다.

당신은 무슨 말을 듣고 살아왔나요?
당신은 어떤 말들을 듣고 자라왔나요?
그 말들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나요?
그 말들이 정말 '당신'의 이야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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