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장비 제작 기업의 연구부서에서 장비 성능을 시험하고 평가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기계 앞 책상에 노트북을 연결해 그래프를 뽑아내고 분석하는 모습. 그건 내가 꿈꾸던 '전문가'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더 멋져 보이는 업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일들은 대학원 수준의 지식과 경력, 그리고 상사들의 신뢰가 있어야만 맡을 수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서고 싶어 기회를 엿보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이슈가 있을 때 잠깐 참여해 보다가도 인정받지 못하니 이어가지 못했고, 또 다른 이슈에 손을 대봤다가도 같은 이유로 반복해서 내려놓았다. 그래서 항상 생각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러다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타인의 인정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논문을 써야 했고, 졸업을 해야 했다. 그냥 해야 하니까, 남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몰아붙였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보니 쌓인 건 타인의 칭찬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인 아웃풋, 그리고 SCI 논문이었다.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 문장 한 줄, 그래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식이 필요한지 배웠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는 어디에 가도 뒤지지는 않겠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회사에서도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며 맴도는 대신, 그저 파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회사에도 'AI 전문가'라는 사람이 많다. 비전문가들은 그들을 칭송하고, 그들은 전문가처럼 포장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아웃풋은 없다. 서로를 전문가라 부르기만 할 뿐,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AI가 대중화된 지금, 표면적으로 그럴듯한 설명과 이미지 정도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본능적으로 '나도 AI 전문가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연구가 더 바빠 그 무리에 끼지 못했고,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 느낀다.
나는 조용히 내가 하는 연구에 AI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방향을 잡고 있다. 가끔은 못된 마음도 든다. "혹시 내가 먼저 아웃풋을 내면 꽤 통쾌하겠는데?" 하지만 그 감정도 금방 사라진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의 인정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면 무엇이든 그럴듯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같은 전공인의 눈은 절대 속일 수 없다.
진짜 실력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난다. 화려한 포장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평판 속에 묻혀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주목받지 않아도 묵묵히 연구하는 사람, 동일 분야 전문가에게 인정받는 사람, 결국 가치 있는 연구를 남기는 사람이 진짜 연구자라고.
그 자리는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라, 혼자 묵묵히 쌓아 올린 결과가 나를 데려다 놓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