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다.

by 브로콜리

한참 프로젝트 때문에 실험을 하고 있는데 다른 부서 동료 동수에게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잠깐 10분 정도 통화 가능하실까요?"

"아! 지금은 실험 중이라 힘들 것 같은데?"

"네, 알겠어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라 나중에 통화하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후 다시 전화가 왔다.

'뭔가 급하게 할 말이 있구나' 싶었다.

"여보세요? 내가 다시 전화한다는 게 깜빡했네."

"네, 잠깐 시간 되면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요?"

평소 말이 많은 동수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니, 뭔가 일이 있긴 있나 보다.


"아니 글쎄,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이게 말이 되나요?"

약간 화가 난 듯한 동수의 목소리였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란다. 동수가 소속된 팀 팀장과 같은 본부에 다른 팀 팀장이 복도에서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게 싸웠다고 한다. 이유는 동수 소속 팀장이 타 팀 팀장에게 동수와 일 관련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동수와 일을 할 거면 모두 자신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으라고 했단다.

사실 동수는 올해 초 조직 개편으로 현재 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전까지는 지금 갈등이 생긴 타 팀 팀장 소속이었다. 둘은 손발이 잘 맞았다. 동수의 기술과 실무, 그리고 타 팀 팀장의 추진력과 인맥으로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며 예산을 만들고,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 결실이 올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조직 개편으로 동수가 다른 팀으로 발령나버린 것이다.

현 동수 팀 팀장은 동수가 그전 팀 팀장과 계속 협력하는 게 못 마땅해 보인다. 동수가 대부분 기술을 가지고 있고 실무를 하는데 타 팀 팀장은 기술은 없으면서 성과만 가져가려고 한다고 오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동수의 생각은 다르다. 본인이 기술이 있어도 결국 정부 예산을 만들고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 그 기획력과 활동력, 인맥 같은 건 그 팀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팀장과의 협력이 없으면 프로젝트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 현 팀장은 동수의 일을 직접 도와주지도 못하고 그럴 능력도 조금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동수가 다른 팀장과 협력하니 배가 아픈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팀원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내년부터는 타 팀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는 다 빠지면 안 되겠냐?"

팀장이 동수에게 한 말이란다. 그 프로젝트 중에는 내 프로젝트도 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도 동수가 없으면 안 되는 분야가 있는데 말이다.

동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너무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 아니에요? 지금 제가 다른 프로젝트에서 다 빠지면, 만약 제가 필요할 때 그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겠어요?"

들어보니 동수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그 팀장의 속내는 뭘까? 평소에 나를 보면 항상 웃으며 인사하고 성격 좋아 보이는 팀장인데, 유독 자신의 팀과 팀원들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력이 높아 보인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개인이 조직이나 팀에 높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와 인맥을 활용해 외부와 협업하고 프로젝트를 만드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팀장은 그런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팀장을 필두로 조직원이 움직여야 되고, 팀장이 모든 외부 프로젝트나 협업을 조율해야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출중하지 않으니

'조직이니까 상명하복이고 보고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팀원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나는 동수에게 말했다.

"너 말 다 이해하겠고, 그 팀장이 좀 이상하네. 내 생각에 너를 자기 맘대로 못 하니까 답답한 것 같은데? 약간 꼰대 같아."

"그쵸? 정말 미치겠어요."

동수는 내 동조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그런데 내 생각엔 강대강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팀장을 길들인다고 생각하고, 팀장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고민해 보고 그걸 해줘 봐. 그래야 너가 일하기 편할 것 같아."

나는 데일리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 떠올랐다. 그 책에서 배웠던 것들이 정확히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 같았다.

동수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 목소리지만 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나도 몇몇 사람들과 사이가 서먹한 적이 있다. 내가 싫어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싫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싫더라도 티 내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나랑 맞지 않고 책임감 없어 보이는 사람과는 협력을 피했다. 혼자서도 내 몫은 할 수 있었고, 실적도 높게 낼 수 있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는 멀리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점점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더욱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좋게 지내려 노력했지만,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거였다. 사이가 서먹한 사람이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으면, 언젠가는 그들이 부서장이 되고 내 직속상관이 된다는 것. 그럼 더 불편해진다.

지금은 내가 더 치고 올라가서 각자 노선을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전에 관계를 좋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면 굳이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싶다.

사회생활에서는 능력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나도 동료가 약간 능력이 모자라더라도 태도와 인간 됨됨이가 되어 있으면 같이 일하고 싶다. 반대로 태도나 됨됨이가 되지 않으면 같이 일하기 싫어진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상대방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걸 느끼는 순간 그들은 날 적으로 여긴다.


특히 중요한 건 '적을 안 만드는 능력'인 것 같다. 적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 내 발목을 잡을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최소한 적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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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수에게 한 조언도 결국 이거였다. '팀장과 적으로 돌아서지 마라.' 너한테 좋을 거 없다. 팀장이 아무래도 경영진과 더 많이 이야기할 거다. 동수를 적이라고 생각하면, 중요한 자리에서 동수에 대해 좋은 말을 하겠는가? 그걸 조심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동수는 하고 싶은 연구도 많고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싶은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 팀장과의 관계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못 하면 정말 답답할 것이다. 지금은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자존심'을 조금 버리는 시간인 것 같았다.

"오늘 상담해 줘서 고마워요."

동수는 나와 거의 1시간을 통화하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들었는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봤다. 조직이라는 게 뭔가 이상하긴 하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니. 하지만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조직에서 더 강한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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