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에서 우리 연구원에 과제를 수탁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후배가 계획서를 함께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고, 기업에서 제시한 연구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민간 기업이지만 사업계획서 형식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AI 기술을 자신들의 공정에 적용하겠다며 AI 관련 용어도 많이 쓰여 있었다. 언뜻 보면 "오, 멋진데? 구현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만했다. 현재 연구원에 근무 중이지만, 이 분야는 내가 10년 이상 현장에서 실무 경력을 쌓은 분야다. 현재 나는 학계와 산업계 중간쯤 위치에 있다. 최근 AI 관련 연구가 각광을 받으며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계획서를 읽으면서 '이건 AI 적용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AI를 굳이 적용한다면, 그것을 위해 불필요한 데이터를 습득해야 했다. 그 데이터는 최소 몇 년은 쌓아야 가능한 양이었다. 기업에서 개발하겠다고 하는 내용은 AI가 필요 없어 보였지만, AI를 적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계획서처럼 보였다.
이런 문제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몇몇 연구원들은 프로그래밍 실력도 좋고 데이터 분석 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문제 설정이 항상 이상하다는 점이다. 풀어야 할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들이 구현할 수 있는 방법에 먼저 집중한다. 그 문제가 정말 산업에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대개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산업에서는 쓸 수 없다. 나는 그런 결과물을 '예쁘게 포장된 쓰레기'라고 부른다. 발표는 하는데 학술 용어만 나열하고, 실제로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불명확했다. 자신의 연구만 설명하고, 산업에서 이게 왜 필요한지, 이걸 어떻게 쓸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술이 있어도 필드에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업에서 작성한 연구제안서였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후배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이거 뭘 하자는 건지 파악이 어려운데? 순 엉터리다. 문제 설정이 이상해. 이건 잘못 받았다간 고생길이 열릴 것 같으니 재검토해서 다시 역제안하자."
"그렇죠? 저도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박사님께 같이 검토해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후배가 보기에도 기업에서 작성한 연구계획서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민간기업에서 연구비를 받고 용역 과제를 진행하면, 구현 가능한 기술을 개발해줘야 한다. 문제 설정이 잘못되면 연구가 끝나는 시점에 서로 곤란해진다. 우리는 "연구가 끝났다"라고 하고 기업은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분쟁이 생긴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설정하는 게 중요했다.
지금은 AI 붐이다. 많은 기업이 AI를 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AI를 적용했다는 흔적이 필요하다. 정부 과제를 받기 위해서, 사업계획서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어디엔가 AI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AI가 필요한 이유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AI는 도구가 아니라 장식이 된다. 중소기업은 AI가 없으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혀, 관련 기술을 한 줄이라도 적어줄 연구원과 학교를 찾아다닌다. 어려운 용어와 화려한 그림에 현혹되고, 사업이 선정되면 기업과 연구소, 학교는 AI를 보여주기 위해서 AI를 만든다. 필드의 문제는 무시하고, 오직 AI 적용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산업에서 쓸 수 없거나 불필요한 것들이다. 반면 요즘 대기업에서는 외부 공공기관과 굳이 협업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직접 AI 관련 인력을 채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분야에 직접 사용 가능한 기술을 만든다. 정부 지원금이 필요 없고, 실제 필드에 필요한 기술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나는 후배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산업에 필요한 문제로 다시 설정해서 역제안하자. 안 된다면 이 과제는 받지 말자."
필드의 문제를 먼저 설정하고, 그 문제를 푸는 데 AI가 필요하면 AI를 쓴다. 필요 없으면 다른 방법을 쓴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필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기술자와 현장을 연결하는 사람. 둘 다의 언어를 하고, 둘 다의 제약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실제 가치를 만드는 연구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기술 트렌드는 언제나 새로운 게 나온다. 내일은 또 다른 기술이 유행할 거다. 하지만 산업의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문제를 봐야 한다. 그다음에 기술을 선택해야 한다. 역순이 아니라. 박사라고 해서, 기술을 안다고 해서 필드의 문제를 푸는 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필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필드를 위한 기술을 만든다. 그 결과를 필드가 이해할 수 없으면 아무리 정교한 솔루션도 현장에서는 쓸 수 없다. 결국 '예쁜 쓰레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