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간이 나를 데리고 온 지 15년이다. 인간들은 쉽게 지겨워해서 보통 우리들의 운명은 담긴 잉크를 다하지 못하고 책상 밑이나 장롱, 소파 밑 어디엔가 굴러다니다가 버려지곤 한다. 그런데 이 인간은 내 속에 잉크를 번갈아 채워가며 15년이나 나를 놓아주지를 않는다. 내 머리는 진작에 깨져 꽂혀 있던 작은 지우개는 나가버린 지 오래전이고, 투명했던 내 몸은 닳고 닳아 하얀색이 되어가며 옆구리는 깨져 금이 가있는데도 말이다. 이쯤이면 나를 좀 보내줄 때도 되었건만, 참 질긴 인간이다.
학생인 듯한 이 인간은 무슨 시험을 보겠다며 나를 직접 데리고 왔다. 나는 지하에서 다른 펜들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서 무생물만의 '가만히 있을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었다. 약간의 습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잉크에게는 꽤나 좋은 조건이었다. 하루 종일 이곳에 서있다 보면 인간들을 구경할 수 있는데, 빠르게 지나가는 옆모습, 건너편 낱개 물감의 색채를 고르는 뒷모습, 그리고 가장 많이 보는 모습은 내 앞에 서서 두 눈을 부릅뜬 얼굴이다.
나를 데려온 이 인간은 쌍꺼풀 없는 짧은 속눈썹에 마스카라로 한껏 힘을 주고선 역시나 사시가 될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겪는 일이지만 부릅뜬 인간의 눈을 대할 때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고 있으면 위쪽에 있던 오리가 나가고, 털방울이 나가고, 내 옆 칸에 있던 3색이가 나가고 다들 갈길을 찾아간다. 이렇게 우리는 '가만히 있을 자유'를 빼앗기고 어떤 인간의 손에 잡혀 노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날, 이 인간의 손에 잡혀 오게 되었다.
나는 색상이 4개나 있고 샤프펜슬까지 장착이 되어있는데, 이 인간은 주로 검은색만 쓴다. 이럴 거면 검정이만 데리고 오지 나를 왜 데리고 왔는지, 이상한 인간이다. 공부라는 것을 하긴 하는지 검정 잉크는 금세 닳아 없어지고 다른 색상들은 전혀 닳지 않았다. 다른 볼펜들처럼 이제 나는 어디 책상 밑이나 도서관의 한 구석에 버려지겠지. 그런데 몸통이 돌아간다. 잉크를 갈아 끼우려나 보다. 잉크들은 키가 다 다를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지독한 인간, 다른 볼펜을 해부하여 잉크를 꺼낸다. 잉크의 키가 맞지 않자, 이식하려는 잉크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정말 잔인한 인간이다. 내 몸통에 맞추려고 내 앞에서 저런 짓을 하다니...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집착이라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앳되고 순수한 얼굴로 칼 야무지게 잡아 마구 잘라버리고 재조립을 하는 미소를 머금은 잔인한 얼굴.
이 인간은 집착이 심한지 항상 옆에 어떤 남자 인간이 같이 공부를 하고 있다. 가까운 사이 같은데 분명 저 남자아이도 이 인간의 집착으로 잡혀온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된다. 저 남자 인간은 이미 세뇌를 당한 건지 자꾸 이 인간을 보며 미소를 짓거나 볼을 꼬집거나 한다. 남자 인간, 도망쳐!! 얘 이상한 애 같아!!! 잉크 다리 막 자르는 무서운 인간이란 말이다!!!
이 집착의 인간은 결국 시험이라는 게 잘 안된 건지 나는 언젠가부터 필통 속으로 들어가게 쉬게 되었다. 이제는 운명의 시간이군. 그럼 그렇지. 너도 인간인데 또 다른 새롭고 예쁜 펜을 들이고 나를 잊겠지. 그럼 이제 난 '가만히 있을 자유'를 다시 찾게 되는 거야.
빛이 들어온다. 지퍼가 열리고 있다. 나는 온몸으로 빛을 반사시키며 가만히 모른척하고 있었다. 인간의 손은 이리저리 무얼 찾는 듯하더니 또 나를 집어 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주로 낮에 노동을 했는데, 이번에는 뭘 이렇게 저녁마다 쓰는지 모르겠다. 어라? 전에 보이던 그 남자 인간이 왔다 갔다 한다. 저 남자 인간, 안타깝게도 도망치지 못했나 보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도서관이 아니라 집인가 보다. 인간은 한숨을 내쉬며 매일같이 하얀 노트에 뭔가를 쓴다. 이제는 검은색만이 아니라 빨간색, 파란색도 쓰기 시작한다. 빨간 글씨는 가끔, 파란 글씨는 많다. 파란 글씨를 쓸 때마다 종종 한숨이 인다. 이제 아기까지 잡아온 거야? 무서운 인간.
아기의 소리가 잦아들 때면 낮에도 컴퓨터 화면 앞에서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집인데 나를 열심히도 노동시키고 있다. 어떤 날은 필통에 담겨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있는 교실 같은 곳에 가기도 했다. 내가 힘들까 봐 여행을 시켜주나? 난 그런 거 필요 없다. '가만히 있을 자유' 달라.
몇 년이 흐른 건지, 나는 이 인간에게 잊혔다. 드디어 내게 처음과 같은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나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할 때쯤, 지퍼가 또 열린다. 나는 또, 또!!! 이 인간의 손에 잡혔다. 이번에는 갤러리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하고, 시끌시끌 병원인가 보다. 이제는 필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거나 주머니에 꽂혀 있다가 저녁이 되면 책상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다. 아침이 되면, 이 인간의 손에서 다시 노동을 하는 삶이 반복되었다.
이 인간의 손에 잡혀온지 벌써 10년은 넘은 것 같다. 이제 제발 나를 놓아줘. 잉크 다리 그만 잘라...
검정 잉크 8번, 빨강 잉크 1번, 파란 잉크 3번, 녹색 잉크 0번, 샤프심 한 통.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보다. 녹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10년 넘게 썼는데 마르지도 않고 삼분의 이나 남아있다.
하얀 벽이 보인다. 다른 병원인 것 같다. 여기서는 녹색 잉크를 많이 쓰는 것 같다. 무슨 생각인 거지? 파란색을 눌렀다가도 녹색으로 쓴다. 너의 손에 잡혀온 순간부터 나는 볼펜 인생을 하얗게 태웠다.
이제 그만 하자, 제발.
한 15년은 된 것 같다.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신중하게 고른 4색 볼펜은 샤프까지 내장되어 있어 참 버리기가 아깝다. 나는 무거운 필통을 싫어하는데, 대부분의 필기가 이 볼펜 하나로 다 되기 때문이다. 점점 낡아가지만 어디로 없어지지도 않고 내 곁을 지킨다. 시험은 떨어졌지만 가계부를 쓸 때도, 방통대에 다닐 때도, 병원에서 일을 할 때도 항상 나와 함께 해준다. 다른 볼펜의 잉크를 넣더라도 널 버릴 순 없지. 이쯤 되면 너에게도 영혼이 있는 것 같다. 나의 수호신인가?
그런데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 너무 오래되어 몸통의 금이 자꾸 커져간다. 거의 쓰지 않았던 녹색 잉크가 다 닳게 되면 이제 보내줘야겠다. 너도 나와 함께 해서 즐거웠지? 고맙다, 4색 볼펜. 이름이라도 지어줄걸. 안녕!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