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게 빼곡히 놓인 가구들 사이에 끼워지듯 서있던 내 앞에 김씨부부가 섰다. 까치발을 하고 내 책장의 키를 재보고, 서랍도 열어보고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내 옆쪽에 있던 옷장과 함께 나를 사가기로 했는지 사장님에게 카드를 내민다. 나는 며칠 뒤 트럭에 실려 옷장, 화장대, 서랍장과 함께 작고 아담한 김씨네 집에 옮겨졌다.
김씨는 내 앞에 앉아 오랜 시간 뭔가를 하곤 했다. 퇴근하고 오면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집중하였다. 입을 헤 벌리고, 눈과 손은 바빴다. 내 몸 유리에 비친 화면에서는 어떤 남자가 뛰고, 날고, 커튼을 아라비아 단도로 찢으며 타고 내려온다. 무술을 하며 상대방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암석을 오르다 떨어지면 김씨도 안타까워하다가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화를 내기도 한다. 김씨는 화면 속 저 남자를 보며 왕자님이라고 부른다. 없는 집 자식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험한 길을 뛰고, 나르고 할까. 김씨는 저 남자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걸까?
어떤 날은 아기를 흔들침대에 눕히고 컴퓨터 옆에 데리고 와 발로 이리저리 밀며 컴퓨터 속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계속 듣고 있기도 했다. 종종 볼펜을 들고 적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떠드는데 시끄럽지도 않은지 열심히 듣고 적고 한다. 항상 한 가지 볼펜만 사용한다. 색깔이 4가지는 되어 보이는데 김씨는 검은색만 쓴다. 이색저색으로 내 몸에 낙서만 안 하면 되지, 하며 잠자코 김씨의 할 일을 위해 받침이 되어준다. 이번 책은 꽤나 볼만 한지, 몇 시간째 꼼짝을 안 한다.
해가 밝은 날, 김씨는 어쩐 일로 회사에 가지 않는다. 아침인데 내 앞에 앉는다. 노트를 하나 펴고, 언제나 사용하는 4색 볼펜을 잡더니 이것저것 끄적이며 훌쩍훌쩍 운다. 자, 여기 티슈. 내 말을 들은 건지 내 몸 구석에 서있던 티슈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닦는다. 오늘은 왜 집에 있는 거야? 기분이 별로라면 지저분해 보이던 그 왕자를 조종해 봐. 그거 할 때는 기분이 괜찮아 보였는데. 김씨는 노트를 닫아버리고 잠시 이것저것 정리하더니 나가버린다.
나는 너비가 넓고 키가 크다. 책을 꽂을 공간도 충분하다. 값비싸거나, 최신식의 시스템 책상이거나, 원목은 아니지만 유행을 타지 않는 짙은 갈색빛, 공부를 할 수 있는 자리와는 별개로 컴퓨터를 놓을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 어디 하나 벌어진 곳 없이 참 쓸만하다. 그래서인지 김씨는 이사 때마다 나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다니는데, 어떤 날은 아이가 어느새 커서 자기 책상이 좁다는 말을 한다.
김씨는 13년 동안 자기 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나를 움직였다. 나를 끌고 아이의 방으로 간다. 조그만 여자가 무거운 나를 도대체 어떻게 옮기는 건지 나는 김씨 손에 조금씩 끌려 아이방에 도착했다. 끌려가며 슬쩍 보니, 거실에는 아이방에 있던 작은 파란색 책상이 이미 나와있었고 나는 그 자리로 옮겨 가게 되었다. 나는 13년 만에 김씨와 이별을 했다. 비록 다른 방일뿐이나 내 앞에서 왕자를 조종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하던 김씨는 이제 아이가 쓰던 작고 파란 책상을 자기 방으로 옮기고 있다.
김씨의 왕자님은 맨몸으로 뛰고 날고 하던데, 아이의 왕자님은 갑옷을 입었다. 돌아다니며 총도 쏜다. 몸집이 큰 사람부터 희한한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구 화면 속을 돌아다닌다. 어떤 날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더니, 이 집 저 집 다니며 뭘 뒤지기도 하다가 다른 사람이 나타나니 총으로 쏘아 버린다. 어떤 날은 심해에서 이것저것 부품을 모아 우주선이나 잠수함을 만들기도 한다. 뭔가 잘 안 될 때는 나를 주먹으로 마구 치기도 하고 발길질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밖에서 김씨가 아이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온다.
아이는 헤드폰을 끼고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랩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축구를 하기도 한다. 입을 헤 벌리고, 눈과 손이 바쁘다. 김씨와 참 많이 닮았다. 김씨는 왕자를 조용히 조종하던데 아이는 누군가와 계속 이야기를 하며 컴퓨터를 본다. 김씨는 왕자님을 만나는 날이 없어지고 책이나 노트를 펼치는 날이 많았는데, 아이는 책을 보는 일은 거의 없고 주로 컴퓨터 세계에서 산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컴퓨터 속 세상은 확실히 김씨보다 더 다양하긴 한 것 같다. 하늘, 전쟁, 바다, 더욱 현란하고 선명한 그림들, 스포츠, 음악......
김씨가 아이 방에 들어와 내 앞에 놓인 아이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식기세척기를 사길 잘했다고 한다. 이건 뭐냐고 묻는다. 아이가 하는 모험들의 이름을 대답한다. 오우야, 이거 진짜 재밌겠다. 엄마도 나중에 해볼란다.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 안 하고 우리 아들은 심해를 누비고 다니느라 고생하네? 응, 그렇지. 바닷속을 다니려면 힘들어서 공부는 못 해. 그러겠네, 귀여우니까 봐준다. 엄마도 해볼래? 너무 실감이 나서 무서워 못하겠다. 너희 다 키우고 나중에 할게. 엄마는 나중에 페르시아 왕자 다시 깰 거야.
김씨가 조종하던 남자는 페르시아 왕자였구나.
나는 결혼 전 내 책상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언니, 오빠와 나이차이가 많아 내가 책상을 사용해야 할 때쯤엔 언니와 오빠는 결혼을 하거나, 책상이 필요 없어질 나이가 되었다. 그 책상을 물려받아 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친정엄마가 화장대로 쓰고 계시다.) 나는 결혼하면 반드시 내 책상 하나는 꼭 살 것이라 다짐했기에 신혼가구를 장만할 때 가장 먼저 고른 것도 이 진한 갈색 책상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페르시아 왕자'게임을 매일 했다. 그런데 뱃속에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게임 속에 빠져있을 수 없기에 게임을 끊고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이력서를 쓰거나 일기를 썼다. 책상 옆 서가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반과 책들이 꽂혀 있었고, 그것들과 함께 나는 이 책상에서 나를 조각해 갔다. 이 책상에 앉으면 내 세상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가 책상이 좁다고 한다. 아이의 책상 옆에는 만화책들과 풀지 않아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빳빳한 문제집들이 꽂혀 있다. 아이는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 턱으로 내 정수리를 누르며 장난을 하고, 그 큰 덩치로는 어릴 적 사주었던 책상을 사용할 수가 없어, 나는 아이의 책상과 나의 책상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이 넓은 책상에서 '게임만' 한다. 나의 세계를 주었는데. 물론 나도 게임을 좋아하니 이해할 수 있고, 나는 공부를 재촉하는 엄마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환경은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아 아이에게 새 책상을 사주고 다시 내 책상을 가져와야 할 것 같다.
내 책상, 다시 내 방으로 오면 내 책들을 잔뜩 꽂아 놓고 다시 나의 세상을 만들어야지. 오래전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해 둔 것처럼, 설렌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