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Prince of Persia'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을 뜨니, 살갗을 벗겨내고야 말겠다는 듯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익숙한 사막이다. 크고 작은 술탄 모스크들이 보인다. 장안에는 터번을 두르고 수염이 덥수룩한, 일하는 짙은 얼굴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악한 모래바람과 저 멀리 생각 없이 서성이는, 과거에 사람이었던 괴물들 뿐이다. 높은 성, 그 성문 앞에 내가 서있다. 숨이 차오른다. 무너진 성의 끝, 부서진 벽돌의 가루가 만드는 먼지를 가르고 불안하게 놓인 바위들을 밟고 제치며 나는 뛰어올라 저 위로 가야만 한다. 고운 모래먼지는 시야를 가리고 숨을 더욱 차게 만든다. 담장을 따라 뛰어가면 술탄의 도자기 옆에 있는 신비의 우물이 나올 것이다. 그 우물에는 체력을 회복하는 마법의 힘이 있다.
나는 서둘러 나의 백성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만 한다. 마법사는 내 오랜 친구들을 모두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캅사(쌀과 삶은 닭고기나 양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은 볶음밥)를 잘 만드는 하셈, 과일을 파는 나의 친구 캄란, 꽃처럼 예뻐서인지 꽃을 파는 나디아...... 모두가 모래괴물로 변한 것이 벌써 두 계절 전이다. 마법사는 시간의 모래를 관장하려 시간의 단도를 모래시계 속에 결박해 두었다. 나는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 내 키의 세배는 되는 창문에 매달리고 웅크린 채 하수구를 지나 어둠의 방을 헤맨다.
바구니를 짜던 압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공격해 온다. 나의 백성,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음은 아프지만, 얼른 그를 해치우고 기둥을 타고 올라 두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을 지지대 삼아 위로 올라가 몸을 피한다. 한참을 뛰어가니, 술탄의 넓은 성 안 인공 호수가 나온다. 길이 없어 횃불기둥을 잡고 원숭이처럼 건너거나 벽을 타고 달리는 수 밖에는 없다.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자비로운 술탄의 나라는 이미 흑요석 같은 어둠의 마법에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이 모든 악몽을 끝내기 위한 나의 모험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결국 시간의 모래에 감염이 되었고 그 저주로 인해 나에게는 특별한 힘이 생겼다. 맨주먹과 위대한 술탄에게서 물려받은 용기의 검 하나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검은 왕자로 흑화가 되는 저주에 걸리고, 지옥의 사슬을 이용하여 마법사의 심부름꾼들을 더욱 잔인하게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본모습이 아니어서인지 기술을 사용할수록 점점 어둠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다. 어서 빨리 백성들을 구하고 마법사를 단죄하여 술탄의 나라를 찾아야 한다.
가열찬 공격과 수비로 나는 시간의 여왕을 찾으러 가고 있다. 나는 용감하고 용맹하다. 그런데 한 가지, 마차 전투를 할 때는 자꾸만 환생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왜지? 물론 시간의 모래로 인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있지만 이것은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마치 환상처럼 멀리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넘어지고, 체력이 방전되어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또 마차의 가죽끈을 잡고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마차전투뿐만 아니라,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모스크의 꼭대기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도, 암석 옆 정글의 줄기를 잡고 지날 때도 분명 미끄러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또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온몸의 먼지를 털어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다 무심코 앞을 보았는데 사우론의 눈과 같은 것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다시 뭔가 들리는데 이번에는 누군가 내게 '일어나, 일어나라 왕자!' 하는 것 같다. 꿈인가? 모진 모험에 내가 지친 것인가? 아니, 꿈은 아닌 것 같다. 일전에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저 연기, 멀리서 네모반듯한 성에 불이 난 건지 안개 같은 것이 계속 피어오르고 있다. 착각인지 달콤한 향기도 느껴지는 것 같다. 큰 두 눈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나는 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다.
게임 '페르시아 왕자 : 두 개의 왕좌' 표지
하아... 또 죽었어. 왕자 안 되겠네. 마차 구간은 최강의 난이도 구간이다. 전에 '시간의 모래'는 괴물 죽이기도 쉽고 기술 쓰기도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두 개의 왕좌'에서는 게임의 컨트롤이 너무 어려워졌다. 내가 한 살 더 먹어서 감이 떨어진 건가? 한 대 맞고 우물까지 뛰어가다가 또 죽는다고. 일어나, 일어나라 왕자, 힘을 내! 에휴...... 내 바닐라 라떼, 식기 전에 먹고 다시 해야지.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해서 못난이인 나는, 왕자가 단도로 커튼을 찢으며 하강할 때 정말이지 최고의 스릴을 느낄 수 있다. 횃불에 매달려 인공호수를 건널 때는 그래픽임을 아는데도 정말 저렇게 벽을 타고 뛰어가며 건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못하지만, 내가 조종하는 왕자님은 할 수 있다. 아니, 컴퓨터에 전기가 흐르는 이상 목숨의 개수는 무한대니까 죽어도 또 일어나 뛸 수 있다. 우물에서 물만 마시면 다친 부분도 다 낫는다. 이만한 대리만족이 없다.
페르시아 왕자 게임은 윈도 이전 MS-DOS 시절부터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그 당시 네모네모 해상도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이 페르시아 왕자는 캐릭터의 부드러운 움직임, 잔악한 죽음의 표현, 시간제한, 상급의 난이도 등 모든 요소가 당시에는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점점 진화하여 멋진 그래픽과 컨트롤, 더 멋진 그래픽과 스토리를 가진 어둠의 왕자가 나타나 나의 젊은 시절을 꿈의 세계로 안내했다.
아기가 뱃속에 생기고 나서는 왕자와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종일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게임만 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 더 이상 게임을 하면 안 되었다. 나는 왕자님이 잠들어있는 게임 CD를 컴퓨터에서 꺼내어 또 다른 나의 세계, 내 오래된 책상의 한쪽에 고이 꽂아두었다. 실행할 수는 없지만 내가 책상에 앉으면 언제나 내 눈이 그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항상 같은 자리에 그렇게 두고 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나는 다시 왕자를 소환할 것이다. 그때까지 잘 쉬고 있길, 나의 왕자님.
흑화한 왕자님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