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지글지글 읏차! 철컥, 푸우~ 쫄쫄 또르르르, 쿨럭쿨럭 후아아악 치이이이이익~ 쪼르륵, 촵!
얼굴이 큰 알바 아가씨의 손에서 나는 또 태어났다. 내 어머니는 카페 사장님과 알바들, 수명은 10분에서 뭐 사람에 따라 하루종일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잡혀 목구멍을 타고 쉽게 없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 원하면 쉽게 다시 태어나길 반복한다. 따뜻하고 향긋하고 달콤한 나. 안 마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마셔본 사람은 없다는 흔하디 흔한 표현이 걸맞은 흔한 나. 나를 감싸는 손들은 '지난번 또 그 손'이기에 그럴 것이다.
오늘은 빵집이다. 빵을 사며, 재잘재잘 소란스러운 아가씨 둘이 나를 주문했다.
"야 이거 먹어봐. 맛있어."
"이거 뭔데?"
"바닐라라떼."
한 아가씨가 나를 소개한다. 다른 아가씨가 뜨거운 나를 조심스럽게 입술을 내밀어 쭈욱 빨아 마신다.
"오옷~!! 이런게 있었다니~!!! 나 이제 커피는 이것만 먹을 거야, 언니."
내 팬이 또 하나 생기는 순간이다. 그 후로도 나는 이 시끄러운 아가씨들과 계속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소개받은 아가씨는 내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퇴근하면서도 나를 주문해 갔다. 이 아가씨는 집에 가면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컴퓨터 먼저 켠다. 아무도 없는 집, 짙은 갈색 책상 앞에 앉아 나를 앞에 두고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지저분한 남자 하나가 뛰고 날아서 괴물을 잡고 마차를 운전한다. 운전이 어려운지 자꾸 넘어지는 남자에게 일어나라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나는 가만히 서서 식기 전에 따뜻하고 향기롭고 달콤한 나를 먹어주길, 그리고 아가씨 기분이 좋아지길 기대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저 더러운 남자를 왕자라고 부르면서 한숨을 쉬었다가도 나를 마시면 기분이 풀리는지 얼굴근육이 금세 흐물흐물해진다.
이곳이 카페인지 그곳이 카페인지 모를 치과가 우리 카페옆에 새로 생겼다. 그 병원 사람들은 거의 매일 이곳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대략 8~10잔 정도의 주문이 들어오면, 나는 그중에 거의 한두 잔을 차지한다. 꼭 한 잔은 사람들이 '실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손에 잡히는데, 이 '실장님'은 내가 처음 그 손에 잡힌 날부터 줄곧 커피를 마실 때면 오로지 나만 찾는다.
이 카페에서 처음 실장님을 만났을 때, 그녀는 한껏 들뜬 표정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표정이 안 좋아진다. 나를 잡는 손도 점점 힘이 더해지고 한숨도 많이 쉰다. 저번 이사님이라는 사람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울기도 했다. 따뜻하고 향긋하고 달콤한 나를 마셔도 진정이 되질 않았나 보다. 이사님이라는 사람은 울리기도, 달래기도 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웃고 떠들다가도 방에 혼자 들어가 책상에 앉으면 다시 어두운 표정과 텅 빈 눈으로 쪼록쪼록 나와 만난다.
어느 날부터는 낮에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책을 한 권 펼친 채 나를 마신다. 표정이 홀가분해 보인다. 고민이 해결된 듯한 얼굴을 보니, 나 역시 더욱 맛있는 따뜻한 바닐라 라떼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온 힘을 다해 뜨거운 김이 나가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으려 애써본다. 나의 따뜻함과 달콤함이 실장님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같아서. 이전에도 왕자님이라는 더러운 남자가 뭔가 잘 못 할 때마다 나를 마시며 기분을 풀지 않았나. '지난번 또 그 손',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걱정 없이 수다를 떨며 소란스러웠던 아가씨는 이제 실장님이 되어 한숨의 대상이 컴퓨터 속 왕자가 아닌 현실의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한참 동안 실장님은 나를 찾지 않았다. 집에서 컴퓨터 속 왕자님과 놀 때는 혼자였는데 이제는 가족이 생겨서인지 왕자님과 놀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다시 나를 마시게 되었을 때에도 내 옆에 컴퓨터는 어디로 사라지고 거의 매일 책, 노트, 색이 4가지는 되어 보이는 볼펜이 놓여 있었다. 둘이나 되는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따뜻함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듯 보일 때도 있다. 차디차게 식어버린 나는 곧잘 싱크대에 버려지기 일쑤였다.
지글지글지글 읏차! 철컥, 푸우~ 쫄쫄 또르르르, 쿨럭쿨럭 후아아악 치이이이이익~ 쪼르륵, 촵!
이번에는 다른 체인점 카페에서 태어났다. 키가 큰 알바생은 허리를 많이 숙여 무표정하게 나를 만들고 있다. 손님은 디카페인 커피에 우유와 시럽대신 아몬드밀크와 라이트 바닐라 시럽으로 선택했나 보다. 나는 건강해지고 가벼워진 새로운 조합의 바닐라라떼가 되어 누군가의 손에 쥐어졌는데, '지난번 또 그 손'이다. 아가씨였던, 실장님이었다. 안녕! 실장님, 반가워요! 이틀 뒤에도, 주말에도, 어둑해진 저녁에도 실장님은 아몬드밀크와 라이트 바닐라 시럽으로 변경한 나를 주문했다.
낮에는 시골치과 앞 카페에서 실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간은 별로 고민이 없어 보였다. 평화로운 얼굴, 여유로운 표정, 나를 한 번씩 마시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눈.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실장님은 항상 컴퓨터 앞에서 앉아 무언가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멈추었다 한다. 지웠다 썼다 반복한다. 나는 또 옆에서 가만히 따뜻하고 달콤한 나를 식기 전에 마셔주길 기다린다. 내가 볼 땐 훨씬 재미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제는 백지 같은 화면에 뭔가를 쓰는 일이 실장님의 왕자님이 되었나 보다.
우리는 치과 앞 빵집에 빵을 사러 갔다. 이제는 이곳에서 커피도 만든다고 한다. 언니는 바닐라라떼라는 것을 먹어보았냐고 물었다. 얘는 생긴 건 유행하는 거 다 하게 생겨가지고 해 본 게 없어, 하며 핀잔을 준다. 언니가 추천한 따뜻한 바닐라 라떼는 그날 이후 내 인생 최고의 커피가 되었다. 퇴근할 때도 이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들고 집에 가서 '페르시아 왕자'를 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다.
나이가 들고, 참 무시를 많이 당하던 겉만 번지르르했던 치과에서 근무할 때도 따뜻한 바닐라 라떼는 매일같이 내 옆을 지키며 깊은 생각에 쉼없이 이어지는 판단이 수월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사님이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을 내보내겠다며 나를 부드러운 어조로 협박하였고, 그렇게 눈물을 찍다가도 환자가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띠며 맞이해야 할 때도 따뜻한 이 커피 한 잔은 내게 잠시나마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치킨 때문에, 유니폼 때문에, 아이 때문에 그곳을 그만두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다독이고, 여유로움을 배가시켜 주었던 것은 바로 이 따뜻한 바닐라 라떼였다. 비록 예전처럼 옆에 두고 게임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책을 읽거나 사색이 필요할 때에도 낡은 책상 한켠에서 이 커피는 곁을 내어주었다.
따뜻한 바닐라 라떼, 나는 오래된 '따바라중독자'이다. 내 곁에는 소중한 사람들과 내 낡은 물건들이 나를 지키고 있다. 그들 중 따바라는 존재를 넘어 중독인 것 같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 갱년기로 인해 건강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칼슘제를 건네는 약사님의 커피금지 권고에 선뜻 대답을 못하였다. 고지혈인 내 혈액 입장에서도 커피는 썩 반기는 성분이 아니라는데도 참 끊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집 앞의 체인점 커피가게에서는 아몬드밀크와 라이트 시럽을 대신 넣어줄 수 있다고 한다. 중독자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다니,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는 평화로워졌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노화를 빨리 시작한 삶과 그렇게 조금씩 약해질 건강이지만, 방해받지 않고 점심시간마다 글을 쓰는 자유와 역시나 하얀 백지 화면 앞을 지키는 내 따바라는 행복 그 자체이다. 콜레스테롤도 올라가고, 살도 찌며, 칼슘도 빼앗아 간다지만 마음을 녹이고 행복을 주는 이 커피 한잔을 이론적인 통계와 잣대로 재면서 엄격하게 끊어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오래 살고도 싶으니 하루 한 잔, 그중 반절만 마셔보려 노력 중이다. 나의 따뜻한 바닐라 라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