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원래 딱딱한 몸인데 물속에 계속 있으려니 어쩐지 노곤해지는 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물렁해진 나는 갈색의 옷을 벗은 채 산산이 부서지고 으깨져 물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단단했던 내가 물이 되었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다. 가만히 나무에 매달려 햇빛을 쬐는 것이 낙이었던 나를 물로 바꾸어 버리다니. 나의 쓰임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이겠지. 나는 작은 상자에 담겨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아몬드 밀크라고 부른다. 나는 아몬드 밀크가 되었구나.
나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아몬드 밀크들은 전 세계 여러 곳으로 여행을 한다. 마트, 창고, 사람들의 집으로 가기도 하고, 작은 가게나 카페, 병원으로 가기도 한다. 나는 최근에 어느 한 집으로 계속 배송이 되었다. 이 집의 간식 바구니 아래칸이 나의 지정석이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많이 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나를 먹어보려고 다짐했다는 듯.
아침마다 나는 이 집의 '엄마' 또는 '여보'라고도 불리는 사람에게 붙잡힌다. 왜 갑자기 날 먹게 된 걸까? 난 솔직히 단단할 때가 더 맛있다. 식감도 오독거리고, 씹을수록 진해지는 고소함이 나의 매력이었달까. 그런데 물이 된 나는 많이 밍밍해졌다. 사람들이 나를 물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이 묽어진 게 사실이다. '엄마'의 아침식사는 접시 위에 작은 단호박 조각 하나와 포장된 나 한 팩이다. 쪼로록쪽쪽, 나는 금새 없어지고 만다. 내가 있던 작은 팩의 위쪽은 가위로 잘리고 내부는 씻겨져 거꾸로 세워진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나의 일과이다.
지글지글지글 읏차! 철컥, 푸우~ 쫄쫄 또르르르, 쿨럭쿨럭 후아아악 치이이이이익~ 쪼르륵, 촵!
카페로 온 나는 키 큰 알바의 손에 의해 냉장고에서 꺼내져 뜨거운 스팀샤워 중이다. 누군가 우유 대신 아몬드 밀크로 변경했나 보다. 요즘은 다이어트를 많이 하는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유 대신 나를 찾는다. 나는 우유에 비해 열량이 눈에 띄게 적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어떤 여자가 자주 '아몬드밀크에 라이트 바닐라 시럽'으로 주문을 하곤 한다. 거품이 생긴 내 위로 갓 내려진 뜨거운 커피가 쪼르륵 부어지고 바닐라 시럽이 뿌려지면 '따뜻한 바닐라 라떼'가 만들어지는데, 이 라떼 녀석은 그 여자를 잘 아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주 꺼내지는 것은 아니나, 나는 이 냉장고 속에서 얌전히 다음 사람을 기다린다. 커피가 아니어도 다른 마실 것들이 많은, 이렇게나 많은 메뉴들 사이에서도 내가 쓰임이 있다니. 보람이 느껴진다.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내가 더욱 잘 쓰일 수 있도록 가공해 주고, 이렇게 모습이 바뀐 나를 선택해 주다니. 햇살 아래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다.
따뜻한 바닐라 라떼 속에서 나는 듣게 되었다. 이 나이에 호르몬제를 먹어. 그래도 괜찮아, 편해. 우울하고 그런다는데 난 모르겠어, 기분 좋아. 그런데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는데 살이 찌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그래도 이렇게 먹으면 열량이 반으로 줄어서 조금 위안이 돼. 맛도 괜찮아. 먹어볼래? (음, 이것도 괜찮네.) 그치? 먹던 맛 하고는 약간 다르지만 그럼 어때, 이름은 똑같은 바닐라 라떼인데.
내 옆에는 큰 장바구니와 무거워 보이는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엄마'는 나를 또 주문했다. 저녁이 되자, 엄마는 나와 장바구니를 끌고 집으로 나른 후 가장 무거운 저 상자를 따로 들어 가져간다. 무거운 상자 안에는 초록의 동글동글한 단호박들이 들어있다. 너는 나와 함께, 낮아진 기초대사량이 걱정인 엄마의 아침식사가 되어주겠지.
나는 곧 내 지정석인 간식바구니 아래에 위치했다. 한 팩이 꺼내져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엄마를 따라 엄마의 직장까지 가게 되었다. 차분히 앉아서 나와 단호박을 먹을 시간이 없었나 보다. 나는 시골치과의 데스크 구석에 자리했다. 걸레질을 마치고 온 엄마는 나를 들어 쪼로록쪼록 먹기 시작한다. 엄마의 손에 들려 키가 커지니, 앞에서 네모난 짙은 베이지색 소파가 빼꼼히 나를 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다.
뭐라고? 부르도끄?
기름진 음식을 즐겨 먹지도 않고 푸성귀들을 좋아하며, 고기도 살만 먹는다. 그런데도 유전인지, 나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심하게 높아 약을 먹어야만 그나마 정상 범주로 내려간다. 거기에 일찍 맞이한 갱년기는 기초대사량까지 압축을 시켜 평소보다 덜 먹어야 그나마 불어난 체중이라도 유지를 할 수 있다. 한 때는 하루에 1000칼로리만 먹고 하루 한 시간씩 운동을 해보기도 했는데 두 달 동안 겨우 1킬로가 줄어들었다. 꾸준히 해야 했지만 당최 손이 덜덜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아 겁을 집어먹은 나는 그마저 그만두었다. 살이야 찔테면 찌라지. 무서워.
사십 초반에 찾아온 폐경은 무엇보다 건강에 대한 걱정을 키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30대 중반부터 슬슬 시동을 걸었던 것 같다. 젊어서 몰랐을 뿐 그때부터 이미 갱년기였던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체중이었기에 나는 음식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관심이 생기면 알게 되고, 그래서 먹게 된 것이 바로 아몬드 밀크였다. 고지혈도 그렇고, 타고난 것들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좋은 시대에 태어나 약을 먹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겁 많은 나는 아침마다 단호박과 아몬드밀크로 끼니를 때운다. 물론 나는, 인스턴트나 소위 몸에 좋지 않다는 음식들을 갑자기 아예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은 아니다. 대신 세상이 내 편이라 바닐라라떼에 아몬드밀크와 라이트 시럽을 넣어주는 가게도 있고, 커피를 이렇게나 못 끊겠는데도 콜레스테롤은 약의 힘으로 정상치를 잘 유지하고 있다.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들도 호르몬제를 먹으면서 다 사라지고 불편이 없다.
단지 아침을 꼭 제대로 챙겨 먹어 보려고 한다. 집에서 못 먹는다면 가방에 챙겨서라도, 이 아몬드밀크라도 먹어야 한다. 할 일을 마친 겁먹은 나는 의무적으로 아몬드밀크를 빨아들이고 눈은 무심코 데스크 건너편 소파를 바라본다. 누가 흘린 커피 자국이 보인다. 가서 닦아야겠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