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수다쟁이 관찰자

by 따바라중독자

붙박이, 등 뒤에 노란 조명을 업고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는 나는 이 병원에서 가장 얌전하고 수다스러운 관찰자이다.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원장님이 출근을 하고, 한 시간쯤 뒤에는 직원 1, 2, 3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직원들이 오면 비로소 이 병원에 불이 켜지고 따뜻함이 감돈다. 사람의 온기는 수수해서, 화려하지 않아도 공간을 충분히 의미 있게 꾸며준다. 나는 이 온기가 좋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는 것도, 꼬마가 볼펜으로 낙서를 해도, 할머니가 버스시간이 맞지 않아 일찍 오셔서 나를 침대 삼아 누워 주무시는 것도 다 좋다. 사람들이 좋아 말을 걸어보지만 안타깝게도 다들 듣지 못한다.


여기서 앞을 바라보면, 치과데스크에 머리가 조금 튀어나온 모니터 뒤로 눈이 바쁜 직원 2, 실장님의 진지한 얼굴이 있다. 실장님은 왜인지 요즘 아침 커피를 끊고 생강차를 먹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생강차 대신 두유인지, 우유인지 음료수 같은 것을 먹고 있다.

'야~! 음료수!'

같은 무생물끼리 아는 척을 해보지만 저 녀석은 내 존재를 느끼는 건지 아닌지 그저 실장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


'야, 음료수!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게. 전에 할머니가 데리고 온 강아지가 있었는데 걔 이름이 부르도끄였어. 할머니가 우아한 목소리로 부르도오~끄! 이리 와~ 부르도오~끄!하고 부르시더라고. 걔가 불독이었거든.ㅎㅎㅎ 아! 실장님, 안녕~! 무슨 일로?? 아푸릅푸푸! 이거 닦으러 왔구나. 어제 오후에 동철 아저씨가 커피 흘렸어. 모르는 줄 알았잖아~'



앞에는 각종 홍보용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 하나 끝부분이 떨어져 있다. 지난번 글씨를 배우는데 흥미가 생긴듯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짚어보며 글씨를 읽었을 때 떨어진 것이다. 벌써 1주일이 넘었지만 아무리 직원들에게 얘기해봐도 역시 소용이 없다. 다행히 어제 실장님이 발견하고 테이프를 붙였다. 휴. 이제 안심이야. 바로 앞에서 너덜거리니까, 불편했다구요.


내가 보는 쪽에서 왼편은 데스크, 오른편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진료실이 보인다. 환자들이 오른쪽으로 들어가 한참 없어졌다 나오는 걸 보면 안으로 더 넓은 것 같은데 나는 첫 번째 진료의자만 보인다. 조금 전에 마른 풀떼기 몇 개를 내게 떨어뜨리고 치료받으러 들어간 환자는 겁이 참 많은 것 같다. 자꾸만 무섭다고 하고 떨린다고 한다. 저렇게도 무서울까? 보면 환자는 가만히 누워있고 원장님과 직원들이 뭘 하는 것 같던데. 난 가만히 있는 게 무섭지 않은데 사람들은 무서운 것 같다. 사람은 생각보다 겁도 많고 여린 존재인가 보다.


전에는 어느 부부가 새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형광연둣빛의 아주 작은 앵무새였는데 이름이 호롱이었다. 참 앙증맞게 아저씨 어깨 위에 있다가 사뿐 거리며 내려오길래 드디어 이 귀여운 작은 새가 내게도 발자국을 찍어주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아저씨 바지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더니 똥을 뿌직. 으...... 나에게 쌌다면 어쩔 뻔했어. 보니까 원장님 또 질겁하게 생겼다.


아기는 이제야 걸음마를 시작한 것 같다. 아직 걸음이 서투르다 보니 나를 짚으며 걸음마를 하는데, 내게 닿는 아기의 포동포동하고 촉촉한 손의 작은 면적 안이 참 따뜻하고 좋았다. 직원 중 하나가 아기에게 종이와 볼펜을 주니, 아기는 나를 책상 삼아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얼굴에까지 그림을 그렸다. 간질간질~ 난 괜찮은데. 아기가 돌아가고 어풉푸우풉, 실장님이 가죽을 벗길 듯 나를 빠악빡 닦아보지만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저것 뿌리고 닦고를 반복하다 지친 실장님은 포기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신기한 것은 그 후 매일 실장님이 슬렁슬렁 나를 걸레질하는데 어느샌가 그 볼펜 자국이 다 없어져있다. 실장님의 성실한 걸레는 어느 세제보다도 강력한 듯 보인다.

이곳에는 외국인 환자도 많이 오는데 나라마다 특징이 있다. 중국인은 여럿이 몰려다니며 아주 시끄럽고, 우즈벡이나 티르키에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한국말도 잘한다. 베트남, 태국인들은 수줍음이 많고 순하다.

그런데 누가 봐도 이 동네에서 흔하지 않은 나라의 백인, 함디 아저씨는 꽤나 특이했다.

"안냐쎄요, 나 한쿠싸람이에요. 근데 여권 놓고와쏘, 운전면허증 가지고 와쏘. 나 이렇게 생겼어도 한쿠싸람이에요. ㅎㅎ"

누가 봐도 큰 눈에 쌍꺼풀 진한 백인인데 자꾸 본인이 한국사람이란다. 참 유쾌한 사람이다. 치료도 잘 받고 아내분도 데리고 왔다.

"내 와잎, 케쏙 여기 있어요. 의료보험 1월에 나와. 지금 아파 없어서 1월에 치료할게요. 난 귀화해쏘. 나 한쿠싸람이에요."

"아~ 진짜 한국사람이셨구나~ㅎㅎㅎㅎ 함디 님은 11일, 10시에 예약해 드릴게요."

"11일, 10시, OK! (찡긋~)"

ㅋㅋㅋㅋㅋ실장님 또 빵 터진다. 이곳 사람들의 웃음을 들으면 내 가죽도 더 매끈해지는 듯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치료받기 전 내게 잠깐 기대지만 난 여기서 많은 것을 본다. TV 아래 세 번째 화분은 하루만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삐져서 축 쳐져 고개를 푸욱 숙인다. 쟤는 속 좁게 저러지 말래도 말을 안 듣는다. 너무 예민해. 요즘따라 불만이 많은지 자주 저런다. 실장님이 헛웃음 치며 물을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날 거면서. 데스크 아래 조명도 자꾸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얘도 그러지 말래도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실장님 손에 영영 빛을 밝히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정기적으로 우산을 기부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저 앞에 우산꽂이에 우산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옆에 서있는 공기청정기는 그나마 나와 결이 맞다. 가끔 미세먼지 많은 날은 빨개진 채 큰소리로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통은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며 들숨날숨만 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은 공간이 좋다. 움직일 수 없어도 괜찮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농담과 웃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다양함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나는 수다쟁이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니까 내 수다를 누군가는 느끼고, 내가 본 것들을 전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저번에는......


치과의 소파


동철아저씨가 흘린 게 분명해. 그 아저씨만 왔다 가면 병원 대기실 여기저기가 커피 자국이다. 커피를 뿌리면서 드시는 건지, 드시면서 뿌리는 건지 사람들 잘 앉는 이 소파 위에까지 흘려 놓으셨다. 그래도 소파가 닦으면 스윽 닦이는 재질이라 다행이다.

원장님은 화려하거나 허세, 홍보 같은 것들을 싫어하신다. 그런 원장님을 놀리느라 크리스마스 때 루돌프 머리띠라도 하고 있으면 안 되냐고 했다가 '하고 싶으면 여기서 영원히 나가서 해.'라는 말을 눈으로 하고 계셨다. 그런 특징으로 우리 치과 대기실은 벽에 액자 하나 없이 반듯하고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소파도 역시 벽에 딱 붙어 청소하기가 편하다. 아기가 낙서를 하거나 어르신이 누워계셔도, 풀이나 흙이 떨어져 있어도 걸레질 몇 번이면 된다. 지난번 아기가 그린 그림이 잘 안 지워져서 포기했는데 여러 번 걸레질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없어져 있었다. 아무리 많은 환자들이 와서 떠들어도 저 소파는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끔 저 소파처럼 가만히, 묵묵히, 조용하게 살아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것도 안 본 듯. 난 가끔 수다쟁이가 될 때가 있는데 저 소파는 궁녀처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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