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화분

내 마음 아무도 몰라

by 따바라중독자

나는 여린 식물이에요. 누가 힘을 조금만 세게 주어 잡아도, 바짓춤에 살짝 스쳐 흔들려도 아프단 말이에요. 난 원래 하얀 꽃도 피는데 이파리만 있어서 속이 상해요. 이곳은 해랑 바람도 없고 너무 추워요. 아니, 낮에는 괜찮은데 저녁만 되면 사람들 다 집에 가고 춥단 말이에요. 그래서 꽃이 안 나오겠데요.


실장님은 처음에는 내게 열심히 물도 주고 영양제도 줬어요. 흙은 촉촉하고 잘 스며들어 나는 개운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몇 년째 이파리만 있다고 나에게 실망한 거예요? 왜 요즘엔 매일 물 안 줘요? 꽃이 없어도 이런 환경에서 이파리들이라도 열심히 내보내고 있는데 그런 나의 노력이 안 보이나요?


전에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선 내게 말도 걸어줬잖아요. 새 이파리 나오네~ 아이고 기특해라~ 하면서 칭찬해 줬잖아요. 나 계속 새 이파리 나오고 있는데 왜 요즘엔 나를 가까이 안 봐줘요? 왜 금전이만 오래 보고 나는 안 봐요? 금전이는 원래 알뿌리라 당연히 알에서 줄기가 나오는 거잖아요. 당연한 거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나는 왜 안 봐줘요?


TV밑에 있다 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아요? 내가 한가운데라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난 시끄럽다구요. 옆에 있던 스투키는 어디 갔어요? 여러 개 있었는데 계속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고 있어요. 걔네들 어디로 간 거죠? 실장님이 하나씩 뽑아가는 거 봤어요.ㅠ 나도 어디로 데려갈 거예요?ㅠㅠ

스투키가 머물던 자리


며칠 전에는 소파가 나한테 잔소리했어요. 알고 있어요? 주말에 실장님이 물 안 주고 가버려서 화나 있었단 말이에요. 이번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절대 고개도 들지 않고 줄기에 힘도 안 줄 거고 이파리에 광택도 없앨 거라고 했더니 소파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내가 예민하데요! 다 실장님 잘못이면서!


그런데도 실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주말 내내 추워서 떨고 있었던 화난 나를 보며,


"아이구우~~ 참~ 얘는 진짜 간사스럽다니까.ㅎㅎㅎ 물 며칠 안 줬다고 또 이러고 있어. 이거 봐. ㅎㅎㅎ 아이구 진짜 얘 웃기다~ 자, 자, 어서 물 마셔라. 이제 점심때쯤 되면 또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 떼고 번쩍 일어난다니까."


그러면서 비웃었죠? 내가 그날 평소보다 5분 늦게 회복된 거 알아요, 몰라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내 옆에 까만 화분에 벌레 있었는데 잡았어요? 난 벌레 싫다구요. 나한테 올까 봐 무서워하는 거 몰랐어요? 거기 살던 카랑코에도 걔네들 때문에 죽은 것 같아요. 카랑코에가 얼마나 질긴 애들인데...... 아직도 벌레 있죠? 빨리 저 까만 화분 치워요!


이 병원에서 살기 힘들어요. 작년엔가 재작년엔가는 내 이파리 끊어다가 소녀 동상 옆에 세워놨죠? 난 허락도 안 했는데! 난 좀비 같은 이파리로 소녀동상 옆에 있으려고 태어난 거 아니라구요!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 환자들은 뜨개질 옷 입은 작은 유리병 속에 들어있다고 예쁘다고만 해요. 그건 내가 허락도 안한 내 잘린 이파리일 뿐인데!


지난주엔 식물에 관심이 생긴 막내직원이 뿌리를 내려보겠다며 또 내 몸뚱이를 잘라갔어요. 저번에는 동철아저씨가 커피 먹다가 나한테까지 흘려서 내가 얼마나 식겁했는 줄 알아요? 노란 믹스커피들은 심드렁해요. 자기들이 뜨겁고 진한 색인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왠만한 일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구요. 내 마음은 누가 알아줘요?




바람이 없어서인 것 같다. 치과 대기실에서는 꽃이 피는 식물은 살 수가 없고, 그나마 이파리들만 있는 식물들은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다. 나는 식물을 키우는 데에 소질이 없다. 그런데도 대기실 화분들 ㅡ 금전수, 스파티필름, 이름 모를 조그마한 야자, 스투키, 산세베리아 ㅡ 은 그런대로 크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런 환경은 무리인지 스투키는 하나씩, 하나씩 죽어서 빈자리만 남았고, 산세베리아도 풍성했던 이파리들이 이제는 대머리 아저씨 정수리를 덮은 몇 가닥 안 되는 머리카락처럼 남아있다. 그나마 믿을만한 것은 금전수와 스파티필름이다. 금전수는 번식력이 참 좋아서 잎 하나를 물에 담가놓기만 해도 알뿌리를 형성한다. 그것을 열심히 키워 흙에 심었더니 그럭저럭 줄기가 뻗는다. 이파리 하나에서 돋아난 생명력에 감동이 인다. 사람도 금전수처럼 씩씩하게 살면 어지간한 풍파도 다 이길 것 같다.

스파티필름은 조금 웃기다. 슬슬 엄마의 눈치를 보며 떼를 쓸지 말지 결정하는 어린아이 같다. 요즘은 바빠서 아무래도 화분에 신경을 조금 덜 썼더니 이 스파티필름은 때를 놓치지 않고 티를 낸다. 날 봐달라는 것처럼, 조금만 물이 부족해도 금세 축 늘어져 시든 시금치처럼 되어버린다. 처음엔 당황했다. 식물에 지식에 없어서 버려야 하나 생각도 하다가 물을 다시 줘보았더니 오후가 되니 어느새 다시 예전처럼 살아나 있는 게 아닌가. 헛웃음이 나왔다. 귀엽단 생각도 들었다가, 간사스럽단 생각도 들었다가.


사시사철 같은 모습의 금전수는 무던하고 우직한 느낌이라면, 여차하면 온 줄기로 서운함을 표현하는 스파티필름은 철없는 이의 느낌이다. 그 덕에 스파티필름은 되도록 잊지 않고 슬쩍 한 번씩이라도 눈길을 주게 된다. 싱그러운 모습이 좋아서 데스크 앞 소녀상 옆에 꽂아두었는데 환자들이 다들 예쁘다고 해주신다. 아마 스파티필름도 작고 예쁜 유리병 속 그 자리를 좋아하겠지.


씩씩하고 무던한 금전수와 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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