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여야 한다
약 1년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었다. 당시에 '20세기 폭스' 인트로 영상만 보고 이 영화에 반했다. 영화 시간 1분만에 마음에 드는 영화를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3번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VOD로 나와서도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웬만한 영화 2번 이상 잘 안 보는 나로서는 상당히 드문 일이다. 특히나, 극장에서 2번 본 영화는 흔치 않다. 그 정도로 나에게 의미가 있는 영화다. 영화 [위대한 쇼맨]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영화다.
오랜만에 다시 봤다. 다시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뮤지컬로써 음악뿐만 아니라 쇼적인 장면을 두어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에는 9곡, 리프라이즈된 노래까지 하면 총 11곡이 쓰였다. 104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에 11곡이 쓰였다는 것은 거의 5분에 한 곡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로 영화도 노래가 아주 자주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노래는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고 노래가 나오지 않을 때는 스토리 진행을 시킨다. 이야기만 따지면, 짧지 않은 이야기다. 때문에, 이야기 진행이 아주 빠르지만,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말한다. 이 영화는 1954년 영화다. 그리고 난 이 영화를 2번 정도 밖에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내 인생 영화인 이유는 영화를 보는 가치관을 바꿔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영화는 예술성과 작품성을 두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상업영화는 구경도 안 했다. 그래서 재미없는 예술영화나 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만을 보았다.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다양성에서는 뒤떨어졌다. 그러다가, 영화 사조에 대해 배우다가 1920년대 말,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즐기는 영화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그 덕분에 뮤지컬 영화가 발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대표작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진 켈리가 비 오는 거리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그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이 영화의 다른 부분을 본 적은 없다.
수업시간에 이 영화의 다른 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다.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서 다시 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어쩌면, 그때부터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과거, 상업 영화는 별로라며 극장에 전혀 가지 않았고, 영화는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나였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영화라는 것이 단순 예술적 흥미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것도 영화의 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영화는 무조건 예술만 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어야 자신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가 완벽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위대한 쇼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예술은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동과 즐거움. 이 둘을 땔 수 없는 사이다. 이 영화는 감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즐거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였다. 영화 속 바넘의 공연은 예술적으로는 떨어지는 공연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관객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속으러 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공연에 소외계층을 동등하게 무대에 세웠다는 것은 다른 시선에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영화 속에 평론가로 등장하는 베넷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평가를 해야 한다는 직업정신이 있다. 그는 평론가로써 예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해야한다. 그가 정말 바넘의 공연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건물이 없어지고 망한 바넘에게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평론가가 진짜 사기꾼이지”
나도 이 말에 아주 공감한다. 즐길 수 있어야한다. 하지만, 그 즐거움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을 버릴 순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도 공연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진짜 직업이 된다면, 그것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둘 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에 성공한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위대한 쇼맨]에서 다루는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차별에 대한 것이다. 바넘은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무대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줬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물론, 그들은 단순히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그들을 폄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에도 바넘이 그들을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돈벌이에 이용했다며 영화에 대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항상 숨어있던 그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도 바넘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바넘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나서기를 바라고 있다.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들이 무대로 올라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딘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위대한 쇼맨]은 전기 영화다. 이 부분은 전기 영화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전기 영화를 제작할 때는 이미 고인이 된 자에 대한 예의 혹은 유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시선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되도록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대부분 영화들의 태도다. 실제 바넘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영화가 미화를 했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영화 속에 어느 정도 각색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지 영화 모두가 실화는 아니다. 누군가가 바넘에 대해서 평가를 할 때, 영화만 보고 한 평가라고 하면 그 누가 그 사람 말에 신뢰를 가질지 의문이다. 결국 [위대한 쇼맨]은 ‘바넘이라는 사람이 대충 이런 사람이다’ 라고 소개하는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세한 것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보고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영화가 그것을 판단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바넘의 공연은 예술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내세우면서, 마치 서커스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서커스를 예술적 요소가 떨어진다며 싫어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서커스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것이 예술은 아닐지라도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사람들에게 감정의 변화를 주기 위한 장치들을 많이 사용한다. 감정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 행동이나 인물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쇼맨]의 쇼가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그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편견과 시선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사람의 시선을 무서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당당해져갔다. 물론, 바넘은 상류층들의 예술적인 공연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그들을 조금씩 멀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더 강해졌다. 멀지 않아서 바넘도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되면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절망하고 있는 바넘에게 용기를 준 것도 공연을 하던 공연단원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연을 즐기기도 하지만, 배척하기도 한다. 물론,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배척하는 것은 안되는 일이다. [위대한 쇼맨]의 시대상을 보면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다. 백인 우월 주위가 강하고, 자신들은 다른 인종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백인 가수가 공연하는 노래는 좋은 작품이라고 하면서 즐기고, 유색인종이 하는 공연은 멸시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면서, 결국 이것들을 이겨내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이게 바로 나야”
영화 [위대한 쇼맨]의 O.S.T ‘This is me’의 가사처럼, 나 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는 그것들이 아니다. 아주 좋은 극장에서 수준 높다고 하는 공연을 보는 것도, 몸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공연을 보는 것도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이 아니다. 조금은 어설프고, 서툴지만 자신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그것이 별 볼품없는 곳이라도 그들이 함께하는 삶이 진정한 예술 같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바넘은 자신의 딸이 공연하는 곳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아내와 가장 행복한 미소를 띠며 이 영화는 끝난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어요. 곁에 좋은 사람만 몇 있으면 된 거에요”
영화 속 채러티 바넘이 한 이야기다. 바넘이 자신이 이룬 것을 모두 잃고 나서야 그는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채러티 바넘 역시 바넘과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집 그리고 부모님도 버리고 그를 택한 것이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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