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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했던 걸
좋아하기가 어려워질 때

영화를 '보는' 일에서 '쓰는' 일로: 한 유튜버의 고백

by 따따시



한때 저는 1년에 120편이 넘는 영화를 극장에서 봤습니다. 독립영화든 예술영화든, 낯설고 어려운 이야기에 기꺼이 저를 밀어 넣었죠. 졸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위로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달에 많아야 서너 편, 그마저도 대부분은 상업영화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보는 것'보다 *쓸 수 있는 것'을 더 따지게 됐기 때문이죠. 스크린을 마주하면서도 "이 영화는 콘텐츠가 될까?"를 먼저 생각했고, 그 질문은 영화 감상의 결을 바꿔버렸습니다. 즐기기보다 해석하려 들고, 온전히 머무르기보다 비평적 재료를 뽑아내려 들었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영화는 이상하게도 점차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줄고, '봐야 할 영화'만 압도적으로 늘어난 겁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내가, 과연 여전히 영화 유튜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덕후'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위로


최근 한 유튜버의 영상을 봤습니다. 특정 제품군을 리뷰하는 유튜버인데, 그는 자신을 특정 분야를 좋아하는 직장인일 뿐, 스펙을 줄줄이 외우고 비교 분석하는 '덕후'는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결국 새로운 채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씨네필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것 같아. 내가 관객들 앞에서 GV(Guest Visit)를 한다면… 한 시간 동안 할 말이 있을까?"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라는 자기 검열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저를 붙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정보의 깊이'에서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알고, 더 정확히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입증하려 했죠.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저는 많이 보진 않지만 오래 느끼는 사람이고, 모든 걸 해석하진 못해도 그 안에 있는 감정은 곱씹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건 부족함이 아니라, 그저 방식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멈춰 선 길 위에서


예전엔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졸아도 좋았던 영화 감상이, 이제는 잠깐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이 시간을 다른 데 썼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먼저 듭니다. 그게 영화를 덜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제가 너무 바빠진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절 따라다닌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영화를 향한 그 감각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에서 잠시 옆으로 비켜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는 한때 영화를 보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기쁘고 감사해서 유튜브까지 시작했죠. 누구보다 오래 영화관에 앉아 있었고, 말할 이야기도 많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일이 되었고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영화를 바라보는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 흐름에 마지막 멈춤표를 찍었고, 아직 그 멈춤은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영화가 사라진 것인지, 저의 애정이 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나 자신에게 건네는 허락


지금은 그저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덜 본다고 해서, 그 영화가 제게 의미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제가 덜 말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작았던 건 아니니까요. 제가 조용히 쉰다고 해서, 이 길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이 글은 저 자신에게 주는 작은 허락입니다. "그래도 괜찮아, 그 정도면 잘하고 있어." 그리고 이 허락이, 어딘가에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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