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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지만, 되돌아가진 못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비평

by 따따시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비평문으로 감독론에서 시작해 만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비판과 심리적 분석으로 이어질 것이다. 초반부는 영화의 내적인 구조와 서사 해석, 그리고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작은 가이드로 기능한다. 이후에는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겨, 작품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와 박찬욱 감독의 연출 태도, 그리고 영화가 가진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결국 이 글은 해석 가이드로 시작해 비평 에세이로 끝나는 글이다. 박찬욱 감독이 늘 다뤄왔던 세 가지 코드, 관음·반복·집착을 축으로, 〈어쩔수가없다〉가 어떤 방식으로 그 감정의 회로를 변주하는지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만 감독’을 꿈꿨지만 여전히 오마카세식 영화 세계에 머물러 있는 박찬욱 감독의 현재 위치를 짚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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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 코드는 관음, 반복, 집착이다.
그는 언제나 인간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존재’임을 전제로 영화를 만든다.
그 시선은 사랑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며,
결국엔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로 돌아온다.

신작 〈어쩔 수가 없다〉 역시 이 세 가지 코드 위에 세워져 있다.

감시와 관찰, 그리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세계.

결국 누군가를 바라보던 인간은, 자신이 그 시선에 갇히게 된다.



인원 감축과 만수의 몰락

영화는 제지회사에서 25년을 일한 만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회사는 인원 감축 30%를 선언하고, 만수에게 그 명단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된다. 그 이후 만수는 여러 과정을 거치며, 결말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거부했던 ‘인원 감축’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다. 그는 복직을 위해 경쟁자들을 감시하고, 조용히 제거하며, 결국 그 자리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자리는 이미 바뀌어 있다. 더 이상 ‘제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화 시스템을 감시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겉으로만 제지 회사이지 하는 일은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 범모에게 제지 회사가 아닌 다른 일도 해보라며 외치던 그의 말이 떠오르게 되는 상황이다.

이 장면은 단순히 개인의 몰락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수는 회사라는 시스템 속에서 희생양이자 가해자가 된다. 그는 구조조정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재현하는 인물이 된다. 그가 감시하고 제거하는 동료들은 결국 과거의 자신이다. 이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조는 박찬욱 세계의 핵심이다. 인간은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모방하며 살아남는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드러나는 감정적 균열은 바로 이 ‘자기 모방의 비극’에서 비롯된다.


관음의 변주: 감시에서 감시로

만수는 영화 전반에서 끊임없이 타인을 관찰한다. 범, 시조, 선출 등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때로는 조롱한다. 하지만 그 시선은 결국 자신에게 향한다. 그는 관찰을 통해 살아남으려 하지만, 그 관찰이 곧 통제의 욕망으로 변한다. 결국 사람을 감시하던 그가 마지막에는 ‘기계를 감시하는 직업인’으로 돌아온다. 그는 재취업을 위해서 타인을 감시하던 일을 해오다가, 제지 회사로 복직하여 기기를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감시라는 일을 하기 위한 연습이 되어버린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박찬욱식 냉소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관찰과 감시는 만수의 비극이자, 그의 재능이었다. 그 재능을 살려서 그토록 원하던 제지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단순한 설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박찬욱은 인물의 욕망을 ‘시선’이라는 행위로 표현한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관객이 스크린을 응시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관음은 이 영화에서 폭력의 전조이자 생존의 본능이다.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은 누군가를 응시하고 평가하는 행위 그 자체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동화된 기계를 감시하는 만수의 모습은 인간의 시선이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 시선은 생존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적 본능으로 전락한다.



자동화와 생존의 역설

〈어쩔 수가 없다〉는 노동과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자동화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남은 사람들은 점점 ‘감시자’로 변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대신 시스템을 감시하며, 자신이 언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고 산다. 만수의 복직은 성공이 아니라 변형이다. 그는 생존했지만,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통해 “노력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비웃는다. 그토록 거부했던 인원감축을 스스로 물리적으로 행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된 것이다. 영화 제목처럼 만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이 행해야만 했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족의 서사 역시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만수의 실직으로 변한 것 같은 아내 미리는 결과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수가 변했기에 모든 것이 변한 듯 보인다. 가족의 긴축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었지만, 만수에게는 자존심의 손상으로 다가온다.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역할에 집착하고, 그 집착은 결국 폭력으로 번진다. 경제적 생존이 곧 존재의 증명으로 작용하는 이 사회의 잔혹한 초상이다.

박찬욱은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냉정하고, 인물의 감정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만수의 행위는 비극이지만, 영화는 그 비극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 중립적 시선이야말로 박찬욱식 비판의 방식이다. 그는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관찰한다. 관찰은 냉소를 낳고, 냉소는 결국 현실을 가장 정확히 포착하는 도구가 된다.


명확함과 모호함 사이

많은 이들이 〈어쩔 수가 없다〉를 박찬욱판 <기생충>이라 부른다. 겉으로는 유사하다. 소시민이 구조적 불합리 속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가 천만 관객을 기록할 수 없는, 다수의 관객들이 영화를 명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기생충〉이 명확한 죄와 벌의 구조를 가졌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모든 것을 흐릿하게 남긴다.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처벌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 일뿐이고, 영화 전반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단점이 아니라 영화의 방향일 뿐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당위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조금 과장된 톤으로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박찬욱은 죄를 규명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냉소에 빠져든다. 이것이 바로 ‘박찬욱식 거리두기’다.

〈기생충〉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려는 인물들의 욕망이 충돌하는 이야기였다. 반면 〈어쩔 수가 없다〉의 인물들은 이미 사다리 아래에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같은 층에서 서로를 끌어내린다. 그래서 이 영화의 비극은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다. 아래에서 아래로 밀어내는, 끝없는 경쟁의 굴레. 이 점이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다.


모호함의 미학: “그럴걸요?”

박찬욱의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예”나 “아니요”로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럴걸요?”라고 말한다. 그는 분명히 말하지만, 명확하게 닿지는 않는다. 영화 속 연출의 인위적인 리듬과 계산된 어색함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관객은 늘 어딘가 낯설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 모호함이야말로 박찬욱 영화의 미학이다. 명확하지 않기에 오래 남고, 단정하지 않기에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그 판단을 관객에게 넘기는 것이다. 예술로써 바라본 그의 영화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회적인 현상을 조금 과장된 톤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냉소적인 톤으로 보여줄 뿐이다.

박찬욱의 연출에는 일종의 ‘감정의 거리두기’가 있다. 그는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냉정한 관찰자로 만든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감상’보다는 ‘해석’을 요구한다. 〈어쩔 수가 없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울게 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하게 만든다. 불편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고급 식당의 셰프

〈어쩔 수가 없다〉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잘 만들어져서 멀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박찬욱의 영화는 늘 정교하다. 완벽하게 조리된 고급 요리 같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완성도가 관객과의 거리를 만든다. 박찬욱 감독이 그토록 원하는 천만 감독이 되기 위해선, 때로는 맛을 조금 낮춰야 한다. 그는 아직도 오마카세식 셰프의 자리에 있다. ‘홍콩반점’처럼 대중적인 메뉴로 내려오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박찬욱의 강점이자 한계다. 물론 그렇다고 박찬욱 감독에게 [범죄도시] 같은 영화를 만들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이야 말고 재능낭비가 될 것이니까. 그런데 한 편으로는 재능 낭비를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균형감을 가진다. 그는 대중성을 완전히 버리지도, 예술성에만 몰두하지도 않는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해도 감탄할 수 있는’ 수준에서 소비한다. 〈어쩔 수가 없다〉 또한 그 경계선 위에 있다. 완벽하게 설계된 미장센, 절제된 감정, 냉소적인 서사.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박찬욱다운’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정교함이 오히려 피로함을 낳기도 한다. 때로는 조금의 거칠음이 그리워진다.



집착이 만든 또 다른 나

만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생존은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시스템에 적응한 변형의 결과다. 사람을 감시하던 그는 이제 기계를 감시한다. 그의 집착은 방향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다. 박찬욱은 이 과정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집착은 결국 처음과 다른 나를 만든다.

이 영화는 인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인간을 바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만수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한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구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돌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이 통제자라고 착각한다.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어쩔 수가 없다〉의 핵심이다. 통제하려는 인간이 결국 통제당하는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다.




한동안 영화를 보는 일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던 일인데도, 어느 순간부터는 뭘 봐도 비슷하고, 굳이 글로 쓸 만큼의 감흥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보고 나니, 다시금 말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좋은 영화는 좋은 비평을 낳는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 말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솔직히 말해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을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의 영화는 늘 정교하고 고급스럽지만, 그 세련됨이 때로는 관객과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독한 완성도와 집요한 시선에는 매번 감탄하게 된다.

박찬욱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어떤 주제를 붙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 영화를 통해 자신이 파고든 세계를 완전히 설계하려 드는 사람.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늘 완벽에 가깝고, 그만큼 불편하다.

그래도 이런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니, 적어도 두 시간 동안은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그 두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좋은 영화를 보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 사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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