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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Oct 23. 2020

서울대 합격증을 내다 버리며.

어느 대학 몇 학번이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잖아.

2000년 1월 16일 주민등록번호로 조회한 화면에는 ‘1지망 합격’이라는 글자가 파란색 굴림체로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왜 1지망 합격이라고 하지? 2, 3지망은 쓴 적이 없는데 이게 붙었다는 소리야 떨어졌다는 소리야, 고민을 했다. 어쨌든 합격이네 붙었다는 소리구나 이해하는 데 몇 초가 더 필요했다.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을 날짜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서울대가 목표였던 적은 없었다. 선생님을 포함한 주변 모든 어른이 서울대가 최고라고 노래를 부르니 나의 타고난 반골 기질이 쓸데없이 비죽거린 덕분이었다. 아 진짜! 서울대가 밥 먹여 주냐고? 나만 몰랐나 보다. 서울대가 밥 먹여 준다는 사실을. 서울대가 왜 좋은데요? 야 그 자체가 권력이야 임마! 뾰족한 나의 질문에 논리적인 답변을 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울대 싫다며? 그럼 싫어서 합격하고 안 간 사람이 돼야지,
원서도 안 내면 못 간 건지, 안 간 건지 알 수가 없잖아?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는 몹시 설득력이 있었다. 원서 대금은 물론 면접 논술 때 필요한 왕복 교통비까지 학교에서 내주고, 합격하면 장학금도 준다고 했다. 장학금과 합격증이 목표니까 무조건 붙을 과에 쓰자는 말에 학창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임 선생님의 선택을 따랐다. 늘 앞뒤가 안 맞는 나지만, 인생 최고로 앞뒤 안 맞는 순간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원서를 냈다.      


결국 교사가 되겠다고? 야, 그럴 거면 그때 서울대를 갔어야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 사범대에 편입한다고 했을 때, 친오빠의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몰랐다. 그렇게 싫던 선생님이 되고 싶어질 줄이야. 그 시절 나는 선생님이 싫었고, 선생님처럼 되기 싫었고, 선생님의 말을 듣기 싫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보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일을 안 하는 게 더 중요했다.      


만약 그때 서울대를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팠던 엄마는 내가 멀리 가길 원치 않았고, IMF를 겨우 버텨낸 우리 집은 나의 서울 생활 감당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다면 어떻게든 해결을 했을 테니, 이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서울대를 선택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꼭 서울대여야 할 이유가 나와 내 부모님에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 부모님의 시야에선 포항공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나 또한 그 너머를 바라볼 안목이 없었다. 일례로, 의대는 어떨까요 했을 때 여자가 무슨 의사냐 했던 사람이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평범한 집 아이들부터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할아버지를 둔 아이들까지, 출신만큼이나 경제적 상황도 다양했다. 시험 기간에도 몇 개씩 과외를 하던 나와 체크카드에 정기적으로 백 단위의 용돈이 입금되던 친구들. 그러나 소위 금수저라 불리던 아이들과 나의 본질적인 차이는 따로 있었다. 내가 대학원과 취직을 고민할 때 부모님이 서울대 교수이던 친구는 미국으로 갈까 유럽으로 갈까 고민을 했다. 그들에게 유학은 당연한 일이었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그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입학 후 꽤 오랜 시간을 성취감에 젖어 그저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아직 목표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내가 본 진짜 금수저 아이들은 적어도, 명문대학교 입학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대부분 그들의 부모님처럼 되었다. 나와 같은 대학에서 비슷한 학점을 받았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가진 자들이 자녀한테 줄 수 있는 건 세특 몇 줄 더 채울 경험 거리도, 비싼 사교육도 아니었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높이 꿈꿔 볼 수 있는 가능성과 안목을 넓혀주는 것, 그게 진짜 금수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경쟁력이었다. 만약 나의 부모님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면, 어릴 적부터 나의 안목을 달리 키우지 않으셨을까. 적어도, 어느 대학 몇 학번을 목표로 공부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텐데. 못 배운 게 평생의 한이던 나의 엄마는 대학교 합격증을 앞에 두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고, 열아홉의 나는 자식으로서의 모든 도리를 다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그때 내가 서울대를 갔더라도 나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 달라지는 정도의 변화는 다른 집에서 태어났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미 태어난 이상, 선택이 삶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잘 없다. 그렇다면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가.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만, 내가 가진 많은 장점이 부모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스럽지 않다. 다만 고등학교 때 어느 대학 몇 학번을 목표로 공부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대학 입학 후 성취감에 젖어, 더는 꿈꾸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더욱 후회스럽다. 과외비를 모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기 전에 더 시간을 아껴 공부하지 않았음이 후회스럽다. 학점이 나빴던 것도 아닌데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음이 후회스럽다. 넓은 안목을 가지지 못했던 부모님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금수저 아이들이 한계를 두지 않는 꿈을 꾸고 노력할 때,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뿐 더 이상 꿈 꾸지 않았다. 내가 버린 것은 서울대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가능성과 꿈 그리고 시간이었다.      


이십 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 사랑은 나날이 높아져, 이제 더는 누구도 서울대와 다른 학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서울대가 왜 좋은 거냐고 묻는 어리석은 학생도 나의 교실에는 당연히 없다. 서울대 그 자체가 권력이고 기회라던 나의 고등학교 선생님과, 나는 좀 다른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묻는 사람이 없으니 답을 할 수가 없다. 명문대 타이틀은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인생을 바꾸는 진짜 중요한 일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계속해서 꿈꾸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적어도 어느 대학 몇 학번이 되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는 삼지 말라고 말한다. 부모의 안목을 물려받은 아이들에게는 내 말이 필요가 없고, 내 말이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 안타깝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명문대까지 잘 가서 뒤늦게 사춘기가 왔다던 스토리 많이 들어보셨죠? 적어도 이제, 어느 대학 몇 학번을 인생 목표로 사는 아이들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대 아무 과나 붙을 만한 적당한 곳을 추천해달라는 내 학생의 모습에서, 서울대가 이미 기회고 권력이라던 나의 선생님을 떠올린다. 나는 내 학생들이 명문대학 타이틀보다 가능성과 꿈 그리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길 바라는데, 서울만이 최고, 명문대가 최고인 세상에서 내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이상일 뿐이다.


친정에 남아있던 이십년 전 서울대 합격증을, 이제는 내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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