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잘 지내시나요?
(이어지는 글입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우연이라기에 너무 다행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질 때 나도 모르게 감사를 드리게 된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해안도로에서 나를 태워준 아저씨는 정말 천사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나는 정말로 무모했고 아찔할 정도로 철이 없었다.
큰길 아무 데나 세워달라고 했지만, 아저씨는 고현에 집이 있어 가는 길이니 그냥 같이 가자고 했다. 해안도로를 달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혼자 여행을 왔다는 말에 아이고! 한다. 이십 년 전 여자 사람의 혼자 여행에 흔히 따라붙던 감탄사다. 가는 길에 김영삼 대통령 생가가 있다며 어차피 여행 왔으니 들러보라는 아저씨. 그럼 여기서 고현까지 어떻게 가라는 건가 고민하는 나에게 기다릴 테니 천천히 보고 오라고 했다. 뜻밖의 가이드를 얻었다, 어예!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옥포 해전 기념공원까지 둘러 보고 고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 언제까지 여행해요?
- 고현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쯤 가려고요.
- 숙소는 있어요?
- 아뇨 이제 찾아봐야죠.
- 우리 집에 가서 잘래요?
- ..... 네?
이쯤 되면, 아무리 철없고 무모한 나라도 의심이라는 걸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이나 먹자며 근처 식당으로 움직이는 용달차 조수석에 앉아, 나의 머릿속은 인신매매 납치 사기 등의 온갖 난잡하며 현실적인 단어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내가 산다고 하고, 밥만 먹고 가는 거야.
갈치 조림이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어?
외도 가는 첫 배를 타느라 편의점에서 대충 때운 아침 이후 첫 식사, 불안한 마음보다 배고픔이 컸다. 게다가 갈치 조림은 눈치 없이 너무 맛있었다. 자작한 국물에 갈치 살을 비벼 밥그릇까지 싹싹 긁는 나.
- 저 이제 가볼게요,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 학생이 무슨 밥을 사요, 여기 내 단골집이라 들어올 때 계산 했어요.
- ... 네? (식당 사장님까지 한 팀이었나?)
- 숙소도 안 잡았다면서, 내가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 우리 집에 가서 자고 낼 가요.
얻어먹은 밥은 있고, 부탁할 일이 있다는 데 모른 척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처음 보는 아저씨를 따라가자니 정말 미친 짓 같고.. 울고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불안할 땐 그냥 불안하다고 말을 하자. 될대로 되라지.
아저씨, 저 사실 너무 감사하긴 한데요,
오늘 처음 뵌 분 집까지 따라가서 신세지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솔직히 죄송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숙소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내도 해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진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요.
그럼 잠깐 내 얘기만 들어 보고 갈래요?
그날 밤 나는, 아저씨네 집으로 갔다. 고현 시내의 한 아파트 7층이나 8층 정도로 기억한다. 스위치를 올릴 때 느껴지던 어둠 속의 인기척. 그리고 나의 불안을 덮어버린 깊은 우울과 슬픔. 여름 끝자락의 습한 공기와 적대감 없이 노출된 어둠 속의 눈빛도. 마치 온 집안을 덮고 있던 마크로크로스케가 점등과 함께 휙 하고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밝아진 거실 중간엔 아저씨의 딸이, 마치 가구처럼 놓여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날 하루 중 어느 시점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왔다는 말을 들으며 당신 딸도 혼자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정도로만 기운을 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여행하는 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내가 당신 딸의 좋은 대화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아빠 친구 딸이야, 오늘 밤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건데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돼.
짧은 소개를 마치고 아저씨는 약속대로 집을 비워주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난 아저씨를 따라온 나만큼이나, 처음 만난 나에게 딸을 맡긴 아저씨도 무모하긴 마찬가지였다. 딱히 할 말이 없는 우리는 그냥 어색한 채로 나란히 누웠다. 그러다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더라. 음, 나에게도 너처럼 아픈 엄마가 있어, 라고 했던가. 엄마가 병원에 계신지 오래 됐다며? 라고 먼저 물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위로라던가 따뜻한 말이라던가 그런 쪽엔 젬병이어서 나는 그냥 내 얘기만 계속 떠들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라디오를 켰고, 노래를 듣다가 라디오를 듣다가 또 이야기를 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야기하다 말고 우리는 같이 꽤 많이 울었던 것도 같다.
그 후로 2~3년간 우리는 간간이 메일을 주고 받았다. ‘간간이’의 간격이 조금씩 길어지다가 결국 끊어졌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저씨가 건네준 명함의 두꺼운 고딕체 상호와 이름 세글자 뿐이다. 언제 한번 놀러 갈게요, 헤어지며 건넨 인사는 결국 지키지 못했다. 그 후로 가끔 구글링을 하며 환경운동 관련 신문 기사에서 아저씨의 이름을 보고 혼자 반가워하고, 또 잊었다. 무모한 스무 살의 나와 나보다 더 불안하던 그 아이, 그리고 나를 믿고 하룻밤을 내어준 아저씨에게 감사한 마음만 잊지 않고 있다.
다음날 아침 인사하고 떠나는 나를 아저씨는 더 잡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다는 아이에게 메일 주소를 적어주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그 뿐이었다. 여행지의 기억은 여행지에 두고 온다, 오랜 나의 여행 습관이 시작된 것도 이 때였던 것 같다.
나의 두 번째 혼여행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나 무모하고 철없었던 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온 것은 두고 두고 감사한 일이다. 개강과 함께 여행의 기억은 빠르게 지워졌지만 여행지에서 받은 배려와 뜻밖의 만남, 그리고 인연은 그 후로도 내가 가볍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