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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Nov 02. 2020

나는 지금도 닭발을 먹지 않는다.

콤플렉스 하나쯤 데리고 살아도 괜찮잖아?!

나는 어릴 적부터 뚱뚱했다. 뚱뚱하다는 말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표현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으나 아무리 양보해서 서술해도 통통이나 과체중 수준을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불러 운동은 좀 하고 있니, 물었고, 엄마는 예쁜 원피스를 사입혀도 배 때문에 옷 태가 나지 않는다며 속상해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대식가였다. 저녁 메뉴가 돈가스인 날은 명절날 전 굽듯 돈가스를 굽고 잘라 차곡차곡 넓은 접시에 쌓아 담은 다음 식탁 가운데 두고 밥반찬으로 먹곤 했다. 돼지 등심에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를 차례대로 발라 만든 돈가스는 냉동실에 들어갈 틈도 없이 케첩에 콕콕 찍혀 식탁에서 사라졌다. 평상에 부루스타를 놓고 김치전을 굽는 날이면 양푼 가득한 반죽 물이 깨끗이 사라질 때까지 식사가 계속되었다. 뱃속에 들어간 김치전이 몇 장인지는 세 본 일이 없다. 그러니 내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윤이 나는 하얀 접시에 정확히 수박바 모양으로 잘라 담은 수박 두 조각을 대접받고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원래 수박은 쟁반에 푹푹 썰어 앉은 자리에서 사 분의 일 통은 해치우는 과일 아닌가요.    

  

태어날 때 몸무게가 4.3kg이라고 했다. 어릴 적에는 별 감흥이 없던 숫자에 새삼 깜짝 놀랐던 건 내가 출산을 겪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대식가의 집에서 과체중으로 태어난 선천적 후천적 돼지였던 셈이다. 자라서 당연히 미스코리아가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내 생각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국민학교 입학 무렵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 내가 다시 나를 좋아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릴 적 살던 집 근처 시장에는 닭발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살아있을 때 모양 그대로 주름까지 선명하게 보존된 갈고리 모양의 닭발은 양념에 차곡차곡 재워져 새 주인을 기다렸다.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나타난 닭발의 새 주인들은 닭이 아닌 가게 아줌마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획득했는데, 은박지로 닭발의 절단면을 감싸쥐고 퇴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한 손에 닭발을 쥔 이 기괴한 무리들은 나를 볼 때마다 큰 소리로 외쳤다.      


돼지야~ 돼지야~


여중에서 만난 친구들은 다이어트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야, 니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이 말을 듣고 싶어 일부러 저러나 싶었다. 눈치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혼자 도시락 크기를 줄였다. 더 작은 도시락에 더 적은 밥을 싸갔지만, 군것질을 달고 사는 그녀들보다 내가 늘 더 뚱뚱했다.      


야 좀 열심히 좀 뛰어라!      


매년 체육 선생님들은 나보고 왜 그렇게 대충이냐 했다. 나는 분명 바람을 가르며 뛰었는데. 진짜 최선을 다한 건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억울했다. 혼자 하는 종목은 주목받는 게 싫었고, 함께하는 종목은 나 때문에 질까 봐 싫었다. 달리기, 뜀틀, 앞구르기는 물론 배구, 피구, 발야구까지 골고루 다 못 해서, 체육은 학창 시절 내내 피하고픈 과목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 이제 더는 체육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더는 남들 앞에서 뛰지 않아도 된다!!      


작년 이맘때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진로 체험을 갔다가 경주 한옥마을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한옥마을 자체 프로그램을 반드시 이용한다는 단서가 붙은 숙소라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을 강당에 모았다. 간단히 몸풀기 게임이 끝나고 격파를 한다는데 느낌이 쎄하다. 조별로 나눠 선 아이들 앞에 놓인 송판 여러 장.   

   

 각 팀별 대표는 선생님을 모셔오세요.


네 팀으로 나뉜 아이들은 각각 선생님을 하나씩 골라 끌고 가고 있었고, 피할 틈도 없이 나는 전교생이 만든 둥근 원 중앙, 송판 더미 앞에 서 있었다. 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격파를 해야 한다고? 쌓인 송판 앞에서 나는 너무 긴장했고, 연습 삼아 먼저 해보라는 말에 더욱 얼어버렸다. MC가 알려주는 자세와 꿀팁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한 번쯤 웃음거리가 되어 주어도 괜찮을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그냥 신나서 박수를 쳐줬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날 내가 송판을 몇 장이나 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행사가 채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달구경을 핑계로 따라 나온 동료 선생님이 뜬금없이 업무 질문을 해줘서 참 고마웠던 것만 기억한다.      


시간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평생 뜀틀 한 번을 제대로 넘어 본 적이 없는 나도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 다이어트까지 잘하면 너무 완벽해서 어쩌려고, 사람이 하나쯤  하는 것도 있어야지! 되지도 않은 뻔뻔한 말을 농담으로 던질 만큼, 나에게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몸으로 나서는 일이 어렵고, 운동의 결과를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두렵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무슨 운동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배구, 배드민턴, 탁구, 등 운동이 친목의 수단이 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내가   이상 지속한 유일한 운동은, 거울 속의 나하고만 친하면 충분한, 필라테스뿐이다. 극복하지 못한 콤플렉스 하나를 그냥 데리고 살아간다.  


닭발을 든 그 아이들을 지금 다시 만난다면 어디다 대고 외모 지적질이냐고 받아칠 수 있을 텐데. 욕도 한 바가지 시원하게 날려줄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놀림 받는 내가 죄인 같았다. 지은 죄 없이 뚝뚝 흘린 눈물의 기억을 웃으면서 털어놓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닭발을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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