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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라진 시간> 후기

우리가 본 형구는 어떤 시점의 누구일까

<사라진 시간>은 캐릭터, 상황 모두 불친절한 영화다. 나아가 초현실주의작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시골마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수혁'(배수빈)과 그의 아내 '이영'(차수연)의 일상이 그려진다. 사랑으로 충만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말 못할 비밀을 품고 있는 부부다. 이 비밀을 알아버린 마을 주민 '해균'(정해균)은 이영을 다락에 문을 잠궈 가두고 아침마다 열어주러 온다. 수혁이 이영과 함께한 어느 날 밤 의문의 화재 사고가 발생해 부부가 숨지자 형사 '형구'(조진웅)가 수사를 위해 마을을 찾는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형구는 취조를 위해 마을 행사에 참석해 만취한 다음 날 부부의 집에서 잠을 깬다. 이후 형구는 타인의 눈에 수혁으로 비춰진다.


졸지에 황당무개한 상황에 처한 형구. 누군가 요술봉을 휘둘러 역전시킨 이 상황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이야기다. 형구는 더 이상 형구로 살아가지 못한다. 형구의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은 오직 형구 뿐이다. 지금껏 걸어온 역사가 깡그리 사라졌음은 물론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 형구의 상황은 (형구의 입장에서는)비극 그 자체다.



영화는 자아와 타자의 시선에서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게 만든다. 켜켜이 지내온 시간이 갑자기 사라져 내일 당장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삶을 단단하게 다져나갈 이유가 있을까 싶다.


<사라진 시간>은 실존할 리 없지만 실재를 가정한다면 섬뜩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통해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수사물도, 마녀사냥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지적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시작에 등장하는 부부의 이야기는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점(인물)은 '우리가 본 형구는 어떤 시점의 누구일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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