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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케빈에 대하여>

케빈에게도 '상처'가 있다.


첫 감상 때 느꼈던 불편감은 두 번째 감상 때도 변함 없었고, 세 번째 감상했을 때조차 적응하지 못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원제인 <We need to talk about Kevin>처럼,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왜 그토록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어릴때부터 엄마에게 증오와 분노를 느껴왔던 그는, 결국 씻지 못할 사건의 범죄자가 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악(惡)을 이야기하면서 애(愛)를 역설하는 기묘한 작품이다.



끔찍한 사건과 악을 조명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표현방식은 좀처럼 떠들썩하지 않다. 절제된 대사와 직접적인 범죄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섬뜩함을 지닌 영화. 그래서 보고 또 봐도 낯설게 느껴진다. 케빈의 성장기를 보면, 범죄를 일으킨 '이유'가 보인다. 물론, 케빈이 아니어도 인간에게는 악의 본성이 존재한다. 케빈의 엄마 에바 역시, 원치 않은 아들을 가졌기에 그에게 애정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에게 케빈은 불행의 원인이었다. 케빈이 범죄자가 된 데에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 사랑 받지 못한 케빈은, 어떻게든 '관심을 받고자' 오히려 악을 활용한다.


흔히들, 엄마라면 '당연히'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본능인 건 맞지만, 모든 엄마들이 본능을 지니고 있을까? 에바의 경우처럼, 원치 않은 자식을 갖게 됐고 그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바껴버린다면 경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애증이 있다고 한다면, 에바와 케빈의 관계에는 '애'가 빠져있다. 에바는 사랑할 줄 모르는 엄마다. 심지어 케빈의 울음소리가 싫어, 그를 공사장으로 끌고갔던 그녀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악을 축에 두고 점점 나빠져간다. 케빈의 육체가 커질수록, 악행의 강도도 세진다.



케빈이 저지른 범죄는 잔혹하고 끔찍하다. 또한, 케빈이 아닌 타인들의 시각에서 그는 명백히 극악무도한 존재다. 영화는, 에바와 그 외 사람들의 시선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케빈의 입장이 되어야만 한다. '이유를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는 케빈의 의미심장한 발언. 이것도 영화가 필자에게 계속적으로 불편함을 주는 이유들 중 하나다.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처럼 엄마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지 못한 경우가 있듯, 한 여성이 엄마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그 행보를 걷는다고 해도, 아닌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엄마가 '되어버린다면', 애정을 주는 데 있어서도 결코 능동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 물론, 에바와 케빈 모두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릇된 것을 알면서도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도, 자식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지 못한 엄마에게도 그들 나름의 이유와 상처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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