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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Nov 02. 2023

너를 사하는 분노

영화 <발레리나>리뷰 (스포 포함)

"XX 씨는 뭐에 그렇게 화가 나있어? 화가 많나 봐"

"너 지금 오버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분노, 수많은 감정 중 가장 고독한 감정이 아닐까. 과장된 분노, 잘못된 분노, 고장 난 분노도 있지만 분노는 오직 나만의 것. 타오르듯 맹렬하게 오롯이 홀로 느끼는 감정이다. 그 분노의 근거지는 명확할 때도 있지만 불분명하기도 하다. 이유도 크기도 가늠하기 어려워진 분노가 마음에 일 때 그것이 진정한 고독의 시작이다. 여기 이 고독한 분노에 휩싸여버린 한 여자가 있다.

영화 <발레리나> 리뷰 (스포 포함)

희망도 없이, 매일이 그저 죽어가는 것 같다던 옥주. 그런 날이 있다. 아무리 암울하고 칙칙한 나에게도 하나의 이벤트를 만들어 주고 싶은 날. 옥주는 그렇게 자신의 중학교 동창, 민희가 일하는 케이크 숍에 들른다.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자신을 발레리나라고 소개하는 민희. 천성이 밝고 자유로운 민희에 의해 옥주는 자신의 세상을 조금씩 물들인다. 다음의 생을 꿈꾸고, 그 생엔 자신이 물고기이길 소망한다는 민희에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운다.

선물을 받는 대상에 따라 선물 포장을 예쁘게 하는 게 특기라던 민희는 차마 자신의 삶은 예쁘게 포장하지 못한 채, 발레리나라는 꿈을 담은 토슈즈를 자신에게 선물하지 못하고 옥주에게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다.

민희가 남긴 작은 단서를 갖고 민희가 '부탁'한 '복수'를 하기마음을 먹는 옥주.

처음엔 영문을 모르던 옥주는 점점 민희와 얽힌 사건들을 헤쳐나가면서 차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민희의 복수는, 곧 옥주 자신의 복수로 전이된다.

복수에 성공이란 개념이 따라올 수 있을까. 가해자에게 어떤 형벌을, 어떤 파멸을 겪게 하면 복수의 끝을 경험할 수 있을까. 민희가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겪었을 그 고통과 지옥의 시간을 그 어떤 것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무수한 한국 영화들의 답은 '용서'다. '용서'만이 분노심에서 나를 구원하는 길이며, 너의 죄를 사함으로써 나도 그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레리나>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우선, 벌한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양적으로 비교하고 가해자의 죄를 질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죄를 범한 자들을 벌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가면 뒤에 숨어, 누군가의 인권을 유린한 이의 얼굴을 칼로 찢고, 죄인의 거취를 숨겨주는 자의 다리를 자르고, 공범의 죄를 자수하지 않는 자의 아가리를 찢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천부 인권이 주장되는 나라에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나라에서 이 얼마나 야만적인 논리인가. 많은 논란과 또 많은 맹점을 불러일으키는 형벌이 분명하기에 민주시민사회에서는 절대 시행하지 않기로 우린 약속 아닌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죄에 응하는 '분노'는 죄질에 포함되지 않으며 죄와 동반된 '고통'과 '기억'은 형량에 반영되지 않는 사회라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법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다. 분노는 고독하지만, 그의 복수는 고독하지 않아서 그랬다. 죄를 행한 자는 철저히 고립되어 가고, 죄를 벌하는 자의 영역은 서서히 넓어져가는 영화의 흐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죄인과 죄인이 아닌자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아서 그것을 흐리려는 자들의 목소리가 없어서 좋았다.

옥주를 돕는 조력자들도, 흔히 한국 영화에서 그렇듯, 지지부진한 사연에 유착관계를 갖지도 않고 깔끔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옥주에게, 회사 동료도, 무기를 제공해 주는 무기상도 단 하나를 묻는다. "네 목적이 뭐야?" 이 질문에 의해 그 '목적'이란 것은 자연스럽게 옥주의 사명이 된다. 옥주의 삶에서 놓아서도 놓을 수도 없는 사명. 분노의 목적은 복수다. 끊임없이 분노하는 일만이 진정한 복수라는 역설이 인다.

분노를 애써 찌그러 뜨리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갈급하지 않게 한다. 너의 분노는 잘못되었어. 너의 분노는 영문을 모르겠어. 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그저 "응,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죽어" 한다. 이게 왜 통쾌한지. 이것이 통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혹시 내가 잘못 된 건지. 잘못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건지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긴 하다. 근데, 뭐, 내 알 바 아니고.



두고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일이 있다.

70분짜리 단편 드라마 대본을 쓴 적이 있었다. 고가의 수강료를 내고 들어간 아카데미에서 완성한 대본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그리고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이 세상에. 그래서 그런 대본을 썼던 것 같다. 주인공은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었고, 주인공이 창밖으로 낙하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야구 뱅뱅이로 주변의 것을 모두 때려 부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그 대본을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발표해야 했다. 그리고 겪어야 했던 지독한 피드백의 시간. 가장 최악이었던 건, 침묵이었다는 것. 딱히 누구도 선뜻 피드백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 내 글이 그 누구도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강사의 말,


"땅따코씨는 뭐에 그렇게 화가 나있어? 화가 많나 봐"


그때 달아오르던 얼굴, 젖어오던 손끝, 말 그대로 영문을 모르겠다던 수강생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합평의 시간이 끝나고, 강사는 "어린 것들을 글 쓸 생각 말라"라는 개소리를 끝으로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나는 그 수치스러운 공간에서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싸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본이었다. 맥락도 없고 강사의 말대로, 대상이 없는 분노만이 가득한 글이었다. 독자를 이해시키지 못한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일이 마음에 남는 것은. 그래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남의 분노를 함부로 비아냥대서는 안 된다. 분노는 홀로 느끼는 고독한 감정이다. 분노를 이해받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러나, 타인의 분노를 축소시키거나 같잖게 보는 것 또한 오만이다. 그 당시에 내가 그 강사의 말에 왜 그렇게 수치심을 느꼈는지, 그리고 또 분노를 느꼈는지 이해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첫 번째로 배운, 어른의 일이었다.

글로 쓰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분노를 낳지 않기 위해 이곳에 글로 남긴다.

나 어쩌면 전종서를 조금 사랑하게 됐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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