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초등학생의 도파민은요
한 가지 고백으로 시작하자면 나는 기억력이 정말이지 좋지 않다. 유치원 때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들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본인은 25세이다). 이만큼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며칠 전 친구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되물어 보기도 하고, 5일 전 짜놓은 여행 계획을 다 까먹어 다시 정독해야 하는 수준이다. 보통 친구들 모임 중 꼭 금붕어라는 별명을 맡는 친구가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그런 금붕어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내가 초등학교 시절 절대 잊지 못하는 기억은 점심시간과 하교시간을 도맡았던 슈퍼에서의 기억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초등학교 근처에는 꼭 작은 동네 슈퍼가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에너지 충전소라고나 해야 할까. 국적 불문 공통이니 내가 다닌 학교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이 슈퍼는 우리 초등학교 옆에 위치해 학교에서 30초만 걸어 나가면 바로 만날 수 있었고 항상 친구들과 하교시간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바로 슈퍼로 뛰어갔다. 슈퍼 입구는 좁고 짧은, 햇빛이 잘 안 드는 자그마한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나왔고 입구 앞에는 뽑기 기계가 두 대 있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조립식 장난감이 들어있는 뽑기 기계였던 것 같다. 열심히 뽑기에 집중하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마트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마트는 낮에도 항상 어두웠고 지하실에서 날 것만 같은 약간의 먼지 냄새가 났었다. 마트 바깥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에는 항상 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어 아저씨에게 한 소리를 듣곤 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좋아하던 초콜릿 과자 하나를 집어든 뒤 계산대로 가면 아주머니는 "이런 거 자주 먹으면 살찌는데~" 하고 웃으시며 계산을 해주신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난 후 다시 학교로 뛰어 들어가 놀이터에서 아까 사 온 군것질들을 친구와 나눠먹는다. 우리는 나무 밑 벤치에 앉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핥아먹으며 좋아하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싫어하던 친구의 뒷담화를 하곤 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초등학생들도 무조건 스마트폰을 소지하는 시대지만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 시절 초등학생들의 도파민은 무조건 놀이터였다. 그네 타러 가서는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한테 슈퍼에서 500원짜리 과자 쏘기, 한 바퀴 도는 사람한테 소원 2개 들어주기 등 여러 내기를 걸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단한 승부욕을 가진 초등학생들 아니랄까 봐 격정적으로 그네를 타다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나를 맨날 조폭마누라라고 불렀던 남자아이와 놀이터에서 모래를 뿌리며 싸우기도 했고 슈퍼에서 사 온 젤리를 개미들한테 나눔 하며 어마어마하게 커진 개미군단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다 놀고 나면 항상 스쿨버스 타기 전까지 집에서 먹을 과자들을 사러 슈퍼로 달려가는 게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의 전부였다. 모든 순간에 슈퍼는 항상 빠진 적이 없다. 슈퍼와 놀이터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 없어지면 안 되는 소중한 장소들이었기에.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로 갔을 때도, 몇 년 뒤 재학생이 없어 초등학교가 폐교가 돼 텅 빈 운동장에 잔디가 무릎까지 자랐을 때도 그 슈퍼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항상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성인이 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름이 조금 깊어진 아주머니, 아저씨와 함께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다. 종종 마트를 들릴 때마다 옛 생각이 나 왠지 모를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시간이 정말 야속하다는 말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소중한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 내 머리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는 이러한 기억들은 괜한 향수병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런 '괜한' 향수병 덕분에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살면서 만들어온 작은 순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 한 구석에 자리 잡게 되고 어느 날 우연히 발견 돼 먼지를 털고 나온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샅샅이 기억하려 한다. 기억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지나간 장면들을 붙잡는다. 언제 또 나에게 발견될지 모르는 순간들을 끝끝내 붙잡다 더 이상 이어질 장면이 없어지면 비로소 다시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