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세대갈등과 생존전략
옆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부장이 갑자기 나를 부른다.
“흔희씨, OO 씨에게 업무 지시와 관련된 메시지를 보내면 내용은 확인했다고 알람이 뜨는데 그 뒤에 늘 말이 없어. 일을 자꾸 시키니 기분이 나쁜 건가?”
부장은 40대 후반이었고 OO 씨는 2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20년 남짓한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나는 30대 후반이었다. 부장은 불만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정말로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자기가 실수한 것이 없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장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카카오톡에서 단체 채팅을 해도 비슷해요. 인사에 인사가 이어져서 대화의 끝을 언제 맺어야 할지 애매한 순간이 올법한 상황에 그들은 메시지를 확인했다며 체크 표시를 띄울 뿐이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아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그 세대의 문화라고 생각해 두시면 될듯합니다.”
내 말에 부장은 안도하며 다시 업무를 이어 갔다. 나도 하던 업무를 마저 이어서 하고 있는데 스멀스멀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장이 OO 씨에게 가졌던 혼란스러움을 내 선에서 알고 넘어가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OO 씨에게 말을 전달해야 하는 것인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OO 씨와도 친하고 나와도 가깝게 지내는 동료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대신 OO 씨에게 말을 해 놓겠다고 하였다. 며칠 뒤, OO 씨는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부장님 메시지 내용에 회신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확인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야겠더라고요.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조심스럽다 보니 함께 할 때 이런저런 걱정이 많이 든다. 걱정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상대의 말에 대해 괜한 의도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오해를 쌓는다. 같은 시점을 살아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회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세대는 계속해서 교체된다. 90년대 한때를 주름잡으며 신인류로 칭송 아닌 칭송을 받던 X세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을 모두 겪으며 기성세대가 되었다. MZ세대 중 M 자리를 맡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 인터넷과 함께 자라왔으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규정되던 세대였다. 이 세대도 앞으로 10년 정도가 지나면 50대가 된다. 팬데믹이라는 비정상적으로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Z세대는 특유의 개인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며 조직 내에서 기존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질서와 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전 세대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 주축이 되며 후대의 파격에 놀라게 될 세대이다.
세대 간의 갈등은 비단 오늘만의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마저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부모에게 대들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스승에게도 대든다.’며 세대 차이에 대한 고통을 부르짖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부쩍 세대를 분류하고 편을 가르는 분위기가 심해지는 듯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환경은 변하기 마련이며 특정 시대의 환경을 공유하는 것들이 세대 내에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즘은 세대별 특징이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개인을 규정짓는다. 프레임이 한 번 씌워지면 개인의 의도 없는 행동들도 프레임에 맞춰 꿰맞춰지기 시작한다. 개인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은 개인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분류학의 보편성만 남아 있는 느낌이다.
우리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관계에서 안정감을 주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집단 내의 안정감은 집단 간에서는 서로를 구획하고 차별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나에게 익숙한 방식을 지나치게 고수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좁은 시야로 사람을 바라보면 낯선 것들이 틀린 것으로 둔갑하게 된다. 내 세대 안에서는 익숙한 것으로 공유되는 무언가가 다른 세대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고려되지 못하면 한 세대는 다른 세대를 배척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내가 집요하게 설득하려 들고 있다면 먼저 나의 시야가 지엽적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설득도 상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대는 그저 나와 다를 뿐인데 그를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쌓은 세대 간의 고정관념에 대한 사례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한정된 육체로 만나는 사람들이 그 세대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니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 불쾌감을 느꼈던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지닌 개인의 특수성일 뿐이다. 그에게 어떤 집단의 대표성을 굳이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당신과 내가 다를 뿐이고 당신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면 다양성과 관련된 문제는 맞고 틀리는 정답이 있는 문제로 변질되어 버린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남게 되면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우와 열을 나누며 서로를 배척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세대 갈등 속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이좋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이'는 '거리'의 의미를 지닌다. 결국 좋은 사이라는 것은 적절한 거리감이 있는 사이일 것이다. 누군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다채로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누군가와 반목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내가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럴 때는 내가 그의 삶 속에 들어가서 막대기를 휘저을 것이 아니라 반 발자국 떨어져서 그를 관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그 사람이 지닌 서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내가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사실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쩌면 갈등의 원인은 그에게 있다기보다는 낯선 것을 거부하는 나의 미숙함에 있을 때가 있다. 나의 미숙함을 인정한다면 굳이 누군가를 집요하게 설득할 필요도 없으며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면서까지 나의 방식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꼰대도,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것들도 알고 보면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상대를 관찰하다 보면 그 삶에 연민의 감정이 싹튼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시작은 연민일 것이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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