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통과되면서 해외 농산물의 수입이 전면 개방되었다.그전까지바나나같은 열대작물들은 고율관세와 쿼터제한에 걸려 공급량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시장가격이 형성되었다. 당시 바나나 낱개의 가격은 2천 원, 한 송이 가격은 3만 원이었는데,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편도 항공료 2만 6천 원보다 높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바나나 한 송이면 비행기도 탈 수 있었다. 그 시절에도 부자들은 바나나쯤을 아무렇지 않게 먹었을 테지만, 서민들은 바나나 하나를 먹기 위해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초, 대부분의 사람이 바나나를 사 먹는 것보다 그냥 보는 것에 만족했을 때, 국가정책 일환으로 전 국민의 우유 마시기 캠페인이 벌여졌다. 우유 붐을 타고 빙그레는 1974년에 바나나 맛을 적용한 바나나맛우유를 출시했다. 조선시대 달항아리처럼 생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노란 우유에 소비자들은 호응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바나나맛의 원형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현재까지 바나나맛우유는 초창기 모습을 유지한 채 줄곧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바나나맛우유엔 정작 바나나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대체로 우유 성분이고 거기에 약간의 인도산 바나나 농축액과 향료, 설탕, 색소 등이 가미되었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것은 바나나 본연의 맛과 상관없이 바나나를 닮은 향과 맛을 강조한 혼합음료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다.
초등학교 시절, 바나나맛우유만 먹다가 난생처음 바나나를 먹었는데,혀 끝에서 느껴지는 밍밍함에 당황했었다. 아마도 달달한 우유에 익숙해진 탓일 테지만, 열대목이 빽빽한 정글에서 타잔도 좋아하고 침팬지 치타도 좋아하는 바나나에 환상을 가졌던 것이다. 바나나의 속살엔 향기로운 꿀 같은 게 들어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전의 맛을 느끼고선 실망했다.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나와 부모님 손을 잡고선 다른 한 손에 집어든 바나나맛우유는 이젠 아련한 추억이다. 흰 우유에 비해 특별히 몸에 좋은 것은 없지만, 가끔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 일부러 찾는다. 만약 바나나맛우유에 진짜 바나나를 넣고 건강식을 강조했다면,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닐 것이다. 내가 뿌리칠 수 없는 건 설탕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들어간 달콤한 노란 빛깔의 우유니까.
지금은 편의점엘 가도 진열대에 놓인 바나나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낯설었던 바나나를 실물로 영접했을 당시 벅찼던 나의 감격을 아이들은 모른다. 심지어 바나나 껍질뒷면도 핥아먹었다고하면, 아이들은 무슨 원시시대에 살았냐며까무러지듯 웃는다. 필리핀에 잠깐 있는 동안에는 노점상에서 파는 애플 바나나를 종종 먹었다. 찰지고 굵은 바나나를 핫도그처럼 튀겨서 막대에 꽂아 팔았다. 그때 나는 바나나를 튀겨서 익히면 고구마처럼 부드럽고 달달해진다는 걸 알았다. 가끔씩 시장이나 마트에서 작은 몽키 바나나도 볼 수 있지만, 대개는 모양과 맛이 비슷한 캐번디시(Cavendish)품종이다. 그런데 캐번디시가 소나 돼지의 사료로 사용되다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맛 때문이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로 미셀(Gros Michel) 품종이 주로 재배되었다. 그러다 파나나병이 유행하면서 모든 그로 미셀 바나나가 말라죽는 바람에 대체품이 필요해졌고, 캐번디시는 비록 맛은 떨어지지만 그로 미셀이 비해 생산량이 높다고 판단한 기업들이 다투어 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바나나처럼 코니쉬 크로스(Cornish Cross, 코니쉬 교배종)도 육계용 닭으로 세계인의 식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코니시 크로스는 코니스(Cornish) 종을 다른 품종과 교배시켜 만든 개량 닭을 말한다. 동화책이나 광고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깃털, 붉은 벼슬 그리고 노란 발을 가진 바로 그 닭이다. 코니쉬 크로스는 무엇보다 적게 먹고 빨리 성장하기 때문에 각 지역의 토종닭을 제치고 사육되어 판매된다. 보디빌더처럼 두툼한 가슴살을 가진 코니쉬 크로스와 달리, 우리의 토종닭은 다이어트를 한 것처럼 얇은 가슴살을 가졌다. 또한 고기 중량도 적을뿐더러 제대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코니쉬 코로스보다 2배 이상 긴 시간이 필요하다. 생산량과 효율성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토종닭이 코니쉬 크로스와 같은 산업닭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각 지역을 대표하는 고유한 형질의 닭을 지키려고 불철주야 노력 중이다.
2022년 조류 인플루엔자가 국제적으로 유행했을 때, 우리나라의 양계산업은 박살이 났었다. 수없이 많은 닭들이 산 채로 살처분되어 묻혔고, 달걀 한 판 값이 7천 원까지 폭등했고, 달걀을 사용하는 빵의 가격도 덩달아 춤추었고, 프라이드치킨집은 손님이 떨어져 문을 닫았다. 어떤 나라에선 달걀값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까지 했다. 이처럼 양계산업은 우리 식생활과 아주 밀접하다. 따라서 닭과 달걀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올해도 달걀은 금값에 비유될 만큼 금란이 되었고, 호주 맥도널드에선 달걀이 들어가는 맥모닝 판매를 중단시킨 바 있다. 바나나가 그러했듯 닭에게도 유전적 단일성은 언제든 큰 재앙을 불러일을 킬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재앙을 피하기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축산업은 오히려 단일 품종의 생산을 고집하며, 조류 인플루엔자에 닭이 전염되지 않도록 시설물 차단과 방역에 더 철저해졌다. 그러한 환경으로 닭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햇빛이나 바람이란 걸 느껴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사방이 가로막힌 벽장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연과 인류의 생존은 얼마나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느냐에 달렸다. 이제껏 지구의 시간에서 오직 하나의 우수한 품종만으로 살아남은 생물들은 없다. 그것은 유전자 풀이라는 과학적 논리를 펼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유태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군국주의는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했고 과학적 오류까지 저질렀다. 또다시 그러한 공포가 인류 앞에 언제 드러나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과 인류는 서로의 다양성을 오랫동안 인정함으로써 힘든 상황들을 극복해 왔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진화와 발전은 환경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요구되었다. 그러한 요구에 맞추어 변하기 위해선 항상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변화란, 모든 주체의 다양성을 포용할 줄 아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필요한 시대정신일 것이다.
다행히 이제는 바나나 하나를 사 먹는다고 해서 비행기표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나나에 바나나맛우유, 바나나빵까지 곁들여서 먹는 세상이다. 언젠가 정글에 들어가 줄무늬 팬티만 입고 있는 타잔과 같이 바나나맛우유를 마시고 싶다. 그리고 그와 우유에 없는 다양한 바나나 맛과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두막에서 사는 닭들이 바나나를 먹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모두가 꾸벅꾸벅 잠이 드는 저녁이 되면, 닭들이 하나둘씩 노란 바나나를 타고 하늘높이 날아가는 걸 상상해 보고 싶다.
<참고자료>
* 현재 아시아나항공 기준으로 김포에서 부산까지 편도 일반석 비행기표가 80,700원이고, GS25 편의점 기준으로 델몬트 바나나 한 송이가 4,2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