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붙잡아 두고 싶은 생각들
님처럼 풀 좋아하고 나무 좋아하는 사람은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직장 동료의 추천에 일부러 시간을 내 ‘땅에 쓰는 시’라는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로 영화 속 정영선 선생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대표로서, 실무자로서 현장에서 일을 지휘하고 리드하는 그녀의 열정은 감탄이 나오도록 너무 멋있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았고 내 인생의 새로운 롤 모델을 찾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며 나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 앞으로와 미래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수많은 질문들만 머릿속에 한가득 떠안은 채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정영선 선생님의 삶을 아주 단편적으로 영화로만 보았음에도 나는 그녀의 삶과 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일과 직장에 약간의 권태를 느끼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80이 넘었고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인정한 조경계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했음에도 손끝엔 항상 흙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녀의 까만 손톱 끝을 보며 약간의 소름을 느꼈다. 나는 벌써 무언가 자만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작 3년 차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몇몇 일들이 익숙해지고 직장에서의 관계에 적응을 했다고, 초반에는 분명 직접 내 손으로 흙을 파왔던 것을 멈추고 누가 심어둔 꽃만 곁눈질로 바라보며 내 것이라 착각하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집은 집마저도 그녀의 신념이 경계를 허문 채 한가득 들어와 있었다. 그녀의 집 앞마당에, 그녀가 직접 심은 환하게 피어있는 수많은 한국의 들꽃들을 보며 현재의 나는 내 집에 무엇을 채우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 나는 보통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어떤 생각들로 집을 채우고 있는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또한 무엇으로 내 집을 채워야겠다는 생각도 여태까지 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그런대로, 하고 싶은 게 생기는 대로 좋아하는 야구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말 그대로 시간을 소비하기만 하진 않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집에 와서 까지 일을 하거나 일에 관련된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내 인생을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그만큼 집에서까지 매진하고 정진해 왔던 것이 없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 집(상징적인 의미에서의) 또한 그러한 방향성에 맞춰 추상적인 무언가로 채워보아야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녀가 손자의 손을 잡고 집 앞마당을 거닐며 함께 씨앗을 심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분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은 미래의 자식과 또 그 후손을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치 선생님의 일처럼 직접적으로 환경과 맞닿아있는 일만이 가치가 있고 그 외에 일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 같지만 절대 그런 뜻은 아니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한국의 얼어붙은 취업시장 속에서 그런 부분까지 고민할 여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신념과 미래를 위해 쉽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일을 하면서 내 일이 미래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인지, 그 관점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현실적인 제약이 분명 따르겠지만 그런 고민 자체를 멈추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하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막연하다.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처럼 내 고민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으로 내 삶을 채우고 어떻게 살아야 내 고민들에 답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그때 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하나 해내고 나면 뒤돌아봤을 때 그것이 어떠한 길이 되어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터닝포인트로 또 하나씩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내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원하는 방향성에 가까운 길이 또 하나 나지 않을까 기대도 된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항상 내 머릿속 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있다. '사랑' '자연' '공간' '강아지' 등등. 그것들을 단순히 어디 구석에 처박힌 생각으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현실로 꺼내어 내 집을 채우는 무언가로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그 첫 시작에 대한 각오가 될 것이다. 물론 현실에 다시 희미해지고 흐릿해질 수도 있지만 올해 내게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는 기분이 들고 있는 만큼 이 기분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