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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Dec 02. 2024

키치의 맛


상대가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접하는 최초의 정보는 외모이다. 첫인상이라는 말이 있듯 처음 생긴 이미지가 이후 상황을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외모를 보고 어떤 사람일지 판단하고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 시대마다 미인상이 조금씩 달랐을 뿐 사회는 늘 외모를 봤다. 눈은 어땠을 때 좋고, 코는 어땠을 때 좋고. 이렇게 대중적인 취향이 형성된다. 그리고 대중적 취향은 열등감과 우월감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드러낸다.


여전히 쌍꺼풀 없는 많은 사람이 성형 수술을 한다. 여기에는 쌍꺼풀이 있어야 더 ‘낫다’(better)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더 낫다는 말은 보기에 더 좋다(better)를 의미한다. 특정 모양이나 크기 등을 근거로 어떤 것이 예쁜 거라며 미(美)에 대한 의식이 구체화된다. 그 과정을 거치면 예쁜 것을 넘어서서 ‘우월(superior)’한 것이 된다. 나를 둘러싼 주변에서 쌍꺼풀이 있다는 것은 예쁘다는 것이고 우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쌍꺼풀이 없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예쁘지 않은 눈을 가진 게 되고, 열등한 요소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주변’은 영향력을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 극성맞을수록 열등감은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다. 미적 요소였던 쌍꺼풀의 유무 사항이 열등감의 차원으로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쌍꺼풀이 없으면 ‘열등(inferior)’한 것이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열등에서 탈출하기 위해 쌍꺼풀 수술이라는 행위에 동의하게 된다.


이렇게 취향과 부러움, 열등감 등의 요소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특정한 것을 마치 진품(Original), 명품처럼 여겨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르다고 여겨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마음먹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얻고, 성취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달성하면 또 다른 결핍을 바라보게 된다. 아마 눈을 고치면 코가 거슬릴 것이다. 신체가 아닌 재정 상황도 마찬가지다. 돈을 3천만 원을 벌면 5천만 원이 떠오르고, 5천만 원을 벌면 1억 원을 버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우월감과 열등감의 반복 속 개인의 정체성을 압도하는 사회적 정체성은 자존감과도 연관을 가진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위의 예 같은 상황의 강박에서 자유롭다. 만약 매력적인 외꺼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쌍꺼풀이 없더라도 자신의 눈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쌍꺼풀을 부러워하며 수술을 생각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존감이 낮다면 대중 심리에 의해 선택하게 된다. 이런 선택은 차별성과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필연적 한계를 가진다. 내가 선택해도 오리지널인 내가 주가 아닌 사회의 영향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내가 뭐한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뒤처짐이 느껴진다. 내 삶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결혼, 출산 등 이 연령대에 있을 법한 일은 뭐 하나 이룬 게 없고 경제적인 상황도 풍족함이 없다. SNS는 그런 나를 비웃는 것 같은 사진과 영상이 올라온다. 남들의 모습을 보며 나를 비교한다. 가진 잠재능력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내가 가진 것을 게임 속 능력치 평가하듯 돌아보면 이렇다.                   

 


힘: 약골임

지력: 잔머리만 잘 굴림

민첩성: 재빠름이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음

운: 더럽게 없음


<기타 사항>

키: 자랄 리가 없음

외모: 시간이 갈수록 퇴보함

건강: 나빠질 일만 남았음

돈: 아껴 쓰기 바쁨

기타 등등: 위와 같음



게임이었다면 당장 게임을 접거나 계정 삭제 후 새로 시작해야 할 판이다. 내가 보기에도 안 좋은데 남이 보기엔 얼마나 좋지 않을까.


이런 좌절과 고민 속에 사는 세상의 모든 ‘나’를 위한 처방은 ‘키치’다.


미학 용어인 키치(Kitsch)는 ‘나쁜 예술’이라고 불리고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른다. 키치는 고급스러운 문화를 대중들의 욕구에 맞게 대량 생산, 소비할 수 있게 하는, 진품이 아니면서 진품의 가치나 효과만을 모방하는 물건이다. 정의만 보면 아주 형편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키치는 문화를 저급하게 만드는 요소일까? 그렇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어떤 문화가 고급이고 저급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근거는 무엇일까?


EBS에서 ‘참 쉽죠’ 아저씨로 통했던 밥 로스의 그림은 키치다. 그림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고급스러운데 왜 키치일까? 그의 쇼를 자세히 보면 “자 이렇게 그리니 산이 잘 그려지지요?”하고 ‘정해진 잘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술도 키치, 결과물도 키치, 방식도 키치라고 볼 수 있다. 방식이 왜 키치냐고 묻는다면 학원에서 배우는 그림 잘 그리는 법을 생각해보면 된다. 나무의 그늘을 만들기 위해 색을 섞는 방법, 봄의 들판을 그릴 때는 터치 방법 등 오리지널이 아닌 양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 중에는 풍경을 바로 그리는 사람, 보고 집에 돌아와서 그리는 사람, 잊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그리는 사람 등이 다양하다. 어떤 방식이 그 자연을 제대로 담아내는 것인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에 속한 것이고 오리지널리티의 뺄 수 없는 요소다. 참 쉬워서 누구나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는 그 그림들이야말로, 개성도 작가의 눈도 없이 획일화되어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 낸 상품과도 같은 가짜들인 것이다. 


흔히 팝아트를 보며 키치하다고 말한다. 팝아트의 모순되어 보이고 저가로 느껴지는 모습이 정말 키치일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팝아트 아티스트들의 작품 의도는 반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앤디 워홀이 생각하는 ‘아트’는 기존의 아트 개념을 벗어던지는 공산품 같은 아트, 대량생산되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복제되어 나온 앤디 워홀의 작업 이미지를 본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자본주의 대량생산제도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워홀은 그것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키치는 많은 현대 예술에서 자본주의의 한 부분을 잘 폭로하고 드러내는 비판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어왔을 뿐 절대 싸구려인 것은 아니다. 팝아트는 대중적 이미지를 차용한 작업이 당연히 많기에 키치적 요소가 들어있다. 다만 비판적으로 읽힌다고 팝아트를 키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키치는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을 이상화하는 이미지에 국한된다. 여기저기 모방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세상은 보편적으로 키치를 비웃는다. 오리지널이 아닌 무언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진품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 판단으로써 모방을 하고 있기에 싸구려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키치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착각과 이미지들을 가리킨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형식은 실존의 구멍을 전부 메울 수 없지만, 그 실존의 방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것들이다. 키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절대화되는 이미지들과 삶의 양식들에 대한 거짓과 허위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키치는 삶의 전략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에 신물이 나서 빵을 먹었다 가정해보자. 이것은 밥을 먹는 것에 대한 반대를 통해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효과뿐 아니라 끼니를 해결할 때 빵을 밥 대신 먹는 것에 도전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키치는 현실을 '인지'하는 개인의 수동적 역할을 넘어서서 현실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개인과 현실의 관계를 보여주는 어떤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절대적인 의미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모든 가치나 의미를 향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서 모두 키치가 될 수 있다.


결국, 사회적인 정체성은 하나의 사고를 오리지널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궁극적인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영향력의 차이가 있을 뿐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없다. 모두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내가 알고 믿는 고급도 만들어진 것이고 빈껍데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쌍꺼풀이 없어도, 키가 작아도,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도, 내가 사회에서 바라보는 이상형과 다른 조건을 갖추고 있더라도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나도 당신도 그런 기준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다. 좌절감의 맛만 느끼지 말고 키치의 맛을 느껴보자. 소위 말하는 가슴 차오르는 ‘국뽕’처럼 느껴져도 괜찮다. 못나 보이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훨씬 나아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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