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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Jul 01. 2024

삼재의 맛

“삼재(三災)입니다.”


‘삼재’는 인간의 삶에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이라는 말이다. 이 주기에 접어들면 3년간 각종 재난을 겪는다는데 첫해부터 마지막 해까지 ‘들 삼재’, ‘눌 삼재’, ‘날 삼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보통 3개의 띠가 삼재를 겪는데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삼재는 소띠, 뱀띠, 닭띠가 삼재란다.


2020년 말. 모태신앙에 여전히 교회를 다니는 내가 철학관을 찾았다. 몇 년간 되는 일이 하나 없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리고 관심 없던 분야에서 이를 어떻게 평할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철학관에서 들은 비싼 복채에 대한 답으로 처음 들은 말이 삼재였다. 아무 일도 풀리지 않을 거라며 역술가가 내놓은 방안은 ‘가만히 있으라’ 였다.


풀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람 태도는 달라진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그 역술가는 용한 사람이고 내 팔자는 타고난 팔자라고 여긴다. 반대로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역술가를 또 찾는다. 풀이를 들었을 때 나를 전부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느끼는 소름 끼침은 없었지만, 설명을 듣는 동안 몇 번씩 고개를 끄덕였던 걸 보면 전부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구든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싫은 말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효대사도 어두운 밤 동굴 속에서 마신 물이 해골 물인 줄 알았다면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삼재를 몰랐다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존재를 알고 접하는 삼재의 맛은 쓰디썼다. 


그리고 2021년을 맞았다. 2021년은 내게 거의 버리는 해였다. 연말에 괜히 안 좋은 말을 들었다 싶을 정도로 삼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질적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리적인 영향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노력하면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안 좋은 판세를 뒤집어보려 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돌이켜보니 2021년만 운이 없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2019년, 2020년 모두 재수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경제적으로 누수가 많았다. 계획했던 일들은 다 틀어지기에 십상이었다. 병치레도 잦았던 것 같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삼재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내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패배감에 젖은 지금 억지 긍정인지는 몰라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형적인 한국인이기에 더 심하게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닌지, 경쟁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회이기에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있어야 하고 영향을 주는 변수에 더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모든 이에게 시기와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치 인생의 모든 시나리오와 모범 답안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산다. 심하면 내 삶에 신경 쓰기도 바쁠 때 남의 인생까지 챙기는 오지랖을 부리기도 한다. 대학에 가야하고, 결혼은 언제 해야 하고, 결혼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위치에 도달해 있어야 하고. 연령대별 해야 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 필요한 것, 갖춰야 할 것 등등 다 정형화되어 있다.


졸업하면 취직, 늦어도 30대에 결혼, 자식은 몇 명에 연봉은 얼마나 되어야 하고 집을 마련해야 하고. 그런 정해진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에 나는 얽매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쳐 있었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으면 인생은 망한 것일까? 그렇다고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점점 지치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삼재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도 경쟁 심한 우리나라 풍토가 만들어 낸 부작용이다. 이 덕분에 우리나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승승장구한 것도 맞지만 그만큼 더 쉽게 패배감과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일이 안 풀린다고 느끼는데 왜 갑자기 단 게 당기는 것인지. 입이라도 풀어주려고 편의점에서 과자를 둘러봤다. 늦은 밤 편의점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두꺼운 노트와 책. 주경야독을 넘어 농사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저렇게 사는 열심히 사람도 있는데 나의 능력을 낮잡아 보고 상황을 탓하며 더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나마저 나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시간은 언제나 흘러간다. 지금, 이 순간도. 정말 삼재가 존재한다면 나중에 또 돌고 돌아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탓저탓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일희일비에 지치는 건 나다. 남의 기준만 좇기보다 내 길을 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삼재가 끝나면 점점 복이 들어올 것이다. 철학관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다. 크게 의미를 두려 하지 않겠지만 나름대로 희망 있는 이 말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이 시기를 발판삼아 더 열심히 산다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려나? 괜히 기대된다. 내가 아무런 노력 없이 살았거나, 노력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람보다 더 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빛 볼 날이 올 것이다.


삼재를 자세히 뜯어보면 그 안에서도 ‘복(福) 삼재’, ‘평(平) 삼재’, ‘악(惡) 삼재’가 다 따로 있다고 한다. 재난이 찾아왔는데 되레 복이 된다면 그 삼재는 복 삼재이고, 악재라면 악 삼재라는 말이다. 결국 삼재도 상대적인 것이다. 삼재도 내 기준으로 바라보려 한다. 아직 남은 올해의 삼재가 내게도 복 삼재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의 일들이 불가항력적일 수도 있지만 내 태도나 행동 덕분에 탄탄대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령 아니라 해도 더 단단해진 내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남은 삼재는 피하기보다 소화가 잘되도록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그 맛이 쓴맛이든 단맛이든 간에 말이든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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