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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 Kim Feb 27. 2020

UX 관점 - 01 누구나 청소하면서 UX를 한다.

삶의 공간을 그즈음의 나에 최적화하는 과정, 화장대 정리와 연결 지어

기능은 갖추었지만 난잡하다.


 킴은 정리벽도 있고 수집욕도 있다. 그런데 수집이 정리보다 강하다. 그 결과 멋지게 쌓기의 달인이 되었다. 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주장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다. 바닥에 탑처럼 쌓인 책들을 보다가 킴은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는 버려야 산다. 1개를 사기 위해서는 2개를 버리겠다고 규칙을 정했다. 아래의 사투는 그 과정의 일부였다.

 

 킴은 설 연휴 동안 화장대 정리를 했다. 어느 사이트에서 사고 싶은 식물을 발견했는데 화장대 위에 올려두면 딱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장대 위에 차곡차곡 쌓아둔 물건 중 사용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벌써 몇 년 되었다. 기능은 많지만 뭐 하나 원활하게 할 수가 없었다. 게으름과 욕심 때문에 내가 못생긴 곳에서 살고 있음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마침 좋은 핑계가 있으니 여백을 만들자.



이 물건이 필요한가?


 처음에는 버리기 위해서 청소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버리기 위해서는 화장대가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화장대에서 할 수 있는 행위에 따라 화장대 위에 남을 수 있는 물건이 달라진다. 일부 물건은 사용할 때 거울이 필요해서 그곳에 있고, 어떤 물건들은 방문을 나가기 직전에 필요해서 그곳에 있다. 대부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과거의 도구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이다. 브랜드 및 서비스 가치와 맞지 않는 이벤트, 유행을 지났거나 재고가 남지 않아 더 이상 판매하지 않는 상품을 보는 기분이다. 몇 개는 그냥 화장대 위에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놓여 있었다. 반짇고리나 여분으로 옷에서 딸려 나온 단추 모음, 정체불명의 영수증들. 이전 청소에서 혹시나 하고 남겨두었던 것들이다. 모든 물건을 훑어보고, 필요 없는 것과 유용한 것, 드러내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을 분류했다. 이런 식이다.


자주 쓰고 있는 물건인가?

1년 내로 쓸 계획이 있는 물건인가?

특별한 사건이나 추억과 관계가 있는가?

장기간 보관하더라도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가?  


모두 아니오면 너를 쓰레기통형에 처한다. 버릴 때 상쾌한 기분까지도 들었다. 빈 공간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공간은 행위의 인터페이스이다.


 깊숙하게 숨어있던 물건들을 발견하고 하나씩 살펴보면서 청소의 목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유용한 물건들을 잘 기억하고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사용할 법한 물건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제 위치에 있지 않은 물건은 적당한 곳으로 옮겼다. 빠른 시간 내에 써야 하는 물건들을 파악했으며, 그 과정에서 가치 없던 물건의 활용도도 깨달았다. (오래된 선크림으로 거울을 놀라울 만큼 반짝반짝하게 닦을 수 있다. 쓱싹질에 불이 붙어서 아끼는 구두에 왁스칠도 했다. 화장대 청소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지만. 안 쓰는 물건들이 모여진 상자에서 가장 아끼던 목걸이를 발견했다).


 킴이 화장대라는 이름의 서비스의 메인을 개편하는 중임을 깨달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킴은 자주 쓰는 도구를 도구함 옥상이나 접시 위와 같은 곳에 보기 쉽게 놓았다. 여분의 물건들은 ‘더보기’ 버튼을 누르면 상자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비싼 비누나 여행 갈 때나 사용할 법한 샴푸 샘플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겼다. 선글라스와 반짇고리는 화장대에서 쫓겨났다. 단추 모음은 잘 두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단추를 잃어버리는 날이 오지 않는 한 화장대를 뒤엎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개편이 끝나자 킴은 이제 머리끈과 액세서리가 어디 있는지, 어떤 로션을 먼저 사용해야 하는지, 남아 있는 핸드크림과 립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다. 정리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다.



균형으로 마무리한다.  


 청소는 나의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었는데 두 가지를 새삼스럽게 체험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기능이 더 중요하니 UI는 요구사항대로 그리기만 하라는 말은 무조건 똥이다.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면서 존재하기는 한 기능은 없느니만 못하다. 인터페이스라는 것은 규칙과 상황에 맞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화장대에 모든 것을 다 박아 넣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애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전문적인 화장대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 나는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귀한 물건들을 다 쓰레기로 만들 자신이 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으니 말이다. 두 번째로는 기능에 기반한 사용 맥락만을 따지는 것 또한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화장대 개편은 그저 식물을 사고 싶어서 생겨난 일이다. 나는 화장대에 식물을 놔두고 싶었다. 또한 정리를 마친 뒤에도 내 화장대에는 인형이 3개나 있다. 3개나 있으니 분명히 이 인형들은 화장하는데 필요한 물건이겠지?


 개발은 균형 유지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되는 개발상의 제약 조건들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개발하고자 할 때, 다양한 요소들이 개발팀의 시선을 끈다. 그러나 하나의 요소에 대한 해답은 다른 요소에 대해서는 오답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도널드 노먼,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 범어디자인연구소 옮김, 유엑스리뷰, 2019, 347쪽.

원서: The Invisible Computer, 1998.


 종종 필요한 지 아닌지 아무도 확신 못하는 부가기능을 만들어달라고 요청받곤 한다. 그 기능이 있어야 판매가 수월하다고 하니, 안 넣기도 애매한 노릇이다. 기능들이 UI와 더 나아가 UX에 끼쳐올 해악을 생각하고, 또 그렇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노력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하곤 했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제품 기획 의도와도 맞지 않았다. 지금 내가 뭘 만들고 있지? (그런데 정말 이 기능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나?)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계속하여 화장대를 청소하고,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것이다. 이 화장대가 내가 생각하는 그 화장대였을까? 아니, 아직 부족하다. 더 버려야 한다. 하지만 화장대뿐 아니라 책상도, 책장도, 옷장도, 사진도, 컴퓨터 파일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게다가 버리지 못한 몇몇 (쓰지 않을) 향수나 인형, 식물들이 내 화장대를 더 가치 있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화장대 정리는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계속 논의하면서 더 나은 형태로, 더 나에게 맞게 바뀔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 안의 개발자(=청소 실행)가 게으르다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면.



UX 실무를 시작한 뒤부터, 킴은 세상 모든 것에 관점과 방향성, 그리고 그 형태에 따라 응당히 이어지는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다르겠는가. 내 하루는 내가 설계하고, 일상의 깨달음은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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